“지금 한국이 누리는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40년 노력해 쌓아 올린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스티븐 레비츠키(56)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15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비츠키는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를 연구해 온 정치학자다. 군부 통치나 파시즘 같은 폭력적 체제뿐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에 의해서도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음을 논파한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에서 “제도·법률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상호 관용은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제도적 자제는 주어진 법적 권한을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레비츠키는 “비상계엄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강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정치인들이 규범을 준수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 이번과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 선포를 어떻게 봤나.
“완전한 충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에 성공하고 민주주의를 끝냈다면 한국은 민주주의가 무너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매우 충격이 컸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와 민주주의를 끝장내려는 시도로 게임의 기본 규칙을 명백히 위반했다. 나는 한국 헌법을 모르지만 이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을 해임할 수 있는 사유가 된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민주주의를 죽이려고 하는 대통령이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게 정당한 것 같다. 미국에서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하며 지지자들의 의회 습격을 부추기고 전복을 시도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어야 마땅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도 관심이 상당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곳이 서아프리카였다면 미국인들이 ‘여기서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국·일본을 포함한 서방 국가의 민주주의가 가진 안정성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잠재적인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트럼프가 재집권을 앞두고 있는 시기여서 미국인들에게는 더 극적인 타이밍이었다.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은 ‘미국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질 수 있을까’ ‘미국 민주주의가 붕괴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미국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상에도 영향을 줄까.
“비상계엄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수호한 모델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신생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다. 정기적인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정당은 다소 불안정하지만 두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이 30년 이상 번갈아 권력을 잡으며 정권 교체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또 촛불 집회 같은 대규모 시위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등 시민사회도 매우 활발하다.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가 잘 갖춰져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부정적 영향이 없지 않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한국 정치가 위험할 정도로 양극화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은 이런 양극화가 한국이나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양극화는 왜 위험한가.
“정치인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게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걸 안다. 그게 전체 시스템에 큰 피해를 준다. 그런데 보통 사회는 민주주의를 잃고 나서야 정치인들이 더 나은 방법을 찾았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정치인들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극단주의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꽤 견고하고 야당과 시민사회도 강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정치 양극화가 가져올 결과는 파괴적일 것이다. 몇 년 동안 계속돼 온 정치 양극화 현상과 제도적 전쟁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다.”
-이번 일로 한국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지도자도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승자는 패자를 보호하고, 패자는 승자를 존중해야 돌아간다. 정치인들이 모든 면에서 조심하지 않고, 자기 행동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면 한국이 40년 동안 쌓아 올린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많은 이슈에 대해 매우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고, 특정 사안에 단합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아예 서로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의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면 언제든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배우고 느끼는 점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이번 같은 일이 없기를 바란다.”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에 ‘양날의 검’이라는 게 지론이다.
“모든 미디어 기술에는 장단점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이 다 그랬고 소셜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소셜미디어는 시민과 활동가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서로 협력하게 해준다. 예컨대 태국의 군부 정권, 말레이시아의 장기 집권 여당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소셜미디어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등장한 지 10년 넘은 소셜미디어가 지금 양극화를 강화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소셜미디어가 양극화의 전적인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해도 말이다.”
-소셜미디어는 어떻게 양극화를 강화하나.
“나는 올해 56세인데, 내 세대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문을 읽고 자라며 민주주의를 고민한 마지막 세대일 거라고 생각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선별된 정치 뉴스를 접하는 젊은 세대는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구별하려는 생각이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이런 미디어 환경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메아리가 울리는 방처럼 비슷한 목소리가 증폭되는 현상)를 형성해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점점 더 급진적인 견해를 낳는다.”
-어떤 대책이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소셜미디어를 규제할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루마니아에선 ‘틱톡 스타’ 무소속 후보가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많은 루마니아인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을 틱톡에서 이뤄진 여론 조작 때문에 찍었다는 사실은 소셜미디어가 민주적 과정을 얼마나 훼손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20세기 후반이 민주주의의 황금기였고 21세기 민주주의가 그때보다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여전히 민주주의가 가장 우월한 체제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이번 한국의 경우를 봐도 그 회복 탄력성이 증명되지 않았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경제 성장이나 정의를 보장하지 않고, 부패가 적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목소리를 내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법으로 보장한다. 민주주의는 자신이 싫어하는 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체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다. 중국·러시아를 비롯한 그 어떤 권위주의 모델도 시민들에게 이런 권리를 허용하는 경우는 없다.”
☞스티븐 레비츠키
정치학자로서 정당과 민주주의, 권위주의, 라틴아메리카의 정권 교체 등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 왔다. 2018년 하버드대 정치학과 동료인 대니얼 지블랫 교수와 함께 쓴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가 28개 언어로 번역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적대하는 정당, 양극화된 정치, 무너지는 규범 등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패턴을 통찰한 수작으로 꼽힌다. 현재 미국외교협회(CFR)의 선임 민주주의 펠로로도 활동하고 있다. 1968년생으로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