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29일 100세로 숨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앞서 대통령을 한 사람은 제럴드 포드였다. 2006년 12월26일 숨질 때, 그의 나이는 93세였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우연히 된 대통령(accidental President)’으로 분류된다. 재임 기간도 896일로 2년 반이 안 됐고, 그만큼 업적이라 할만한 목록도 짧았다.
한 가지만 빼고였다. 바로 부패와 뇌물수수, 민주당 도청, 도청 은폐 시도 등 온갖 비리로 얼룩졌던 리처드 닉슨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면’이었다. 포드는 재임 중 이 사면에 대한 비난 여론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했고, 1976년 미 대선에서 카터에게 졌다.
사실 부통령이 된 것부터 포드의 ‘정치 계획’엔 없었다. 닉슨의 러닝 메이트였던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1973년 10월 탈세와 뇌물 수수 혐의로 사임하자, 닉슨은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의회에 부통령감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당시 소수당이었던 연방 하원의 공화당은 포드 한 명만 추천했다. 포드는 자기 색깔이 없고, 절충하고 타협하는 하원 정치의 산물이었다. 하원의원은 상원의원처럼 개인의 비전이나, 주지사처럼 행정 능력이 기대되지도 않았다. 그는 이 하원에서 13번 선거를 내리 이겨 25년째 하원을 지키고 있었다. 8년 간 하원 소수당 대표도 맡고 있었다.
닉슨도 포드라면 부통령이 돼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리라고 안심할 수 있었고, 포드는 부통령 제안을 받고 ‘정치 경력을 부통령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을 끌던 워터게이트 사건에 쫓겨 결국 닉슨이 탄핵을 피하고자 대통령 직을 사임하자, 포드는 졸지에 1974년 8월9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그의 취임 자체가 2건의 정치 스캔들이 연속으로 터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포드는 대통령으로서 급선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20년간 개입한 베트남 전쟁에서 약 1조 달러(2021년 가치 기준)를 쓰고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해외 전쟁에서 졌고, 2년을 끈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미국 사회 전체가 최악의 분열을 맞았다. 다음해에는 캄보디아ㆍ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에 대한 해외 동맹국들의 신뢰도 크게 흔들렸다.
포드는 나중에 자신의 취임 시기를 “우리 역사에서 정신적으로 괴롭고 가슴이 찢어지는 시간이었다. 분노와 적대감이 위험 수위까지 차올라, 친구와 가족들을 분열시켰다. 정치 질서의 양극화로, 보복과 복수의 저급한 열정이 고조됐다. 정부 시스템은 (남북 전쟁을 앞둔) 에이브러햄 링컨이 똑 같은 취임 선서를 한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됐다”고 회상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전혀 과장이 아닌 표현”이라고 했다.
그의 취임 일성(一聲)은 “오래 지속됐던 국가적 악몽은 이제 끝났다”였다. 그러나 포드는 링컨도 아니었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도 아니었다. 포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분이 투표로 나를 뽑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이 막중한 책임을 원한 적도 없지만,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취임 후 기자회견에선 “나는 링컨이 아니라 포드”라고 했다. 자신은 링컨과 같은 역사적인 대통령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겸손과 더불어, 자신은 고급 프리미엄 이미지의 링컨 차가 아니라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포드 차라는 중의(重義)를 담은 표현이었다.
그리고 ‘국가 치유’를 위해 결정한 것이 닉슨에 대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면이었다. 사임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이후 형사 기소되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달이 채 안 된 1974년 9월8일이었다.
포드는 닉슨 사면을 발표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가장 친한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거의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결국 이는 나의 결정이다. 질질 끌고 고민하고 결코 찾아오지 않을 사태 호전 시점을 기다리거나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결정일 수는 있지만, 대통령이 취하기에는 약하고 매우 위험한 행로”라고 말했다.
그는 “사면한다고 해서,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범죄의 사악함이나 우리가 얻은 교훈을 잊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포드는 사면하지 않으면 미국이 거치게 될 역경을 예상하며 “이는 우리 모두가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적인 비극이다. 이 비극은 계속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끝을 내야 한다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언론과 의회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미 전역에서 항의 서한이 백악관에 빗발쳤다. 의회 민주당 의원들과 언론 매체들은 “닉슨에게 사면을 약속하고, 그로부터 사직서를 받아낸 것”이라는 부당거래 의혹을 연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매우 어리석고, 분열적이고, 부당한 행동”이라며, “포드는 서명 한 획으로 새 대통령은 판단이 신중하고 솔직하고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사면 반대파의 논리는 단순했다. 법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미천한 자나 권세 있는 자 누구에게든 평등하게 적용돼야 하며,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법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포드의 절친이기도 했던 공보비서 제럴드 터호스트는 사면이 발표된 날 사임했다. 포드는 임기 마지막날까지 자신의 이 결정을 옹호해야 했다.
포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국 대통령으로선 단 한 차례도 없었던 행동을 했다. 하원 사법위원회의 출석 요구에 응해서, 직접 닉슨 사면이 ‘국가 치유’를 위한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밝혔다. 포드 대통령은 하원 사법위에 나가 “거래(deal)란 없었다. 단연코 어떤 상황에서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포드는 나중에 “사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후 18개월, 24개월, 36개월 동안 신문 1면에 뭐가 실릴지 생각하지 않았다”며 “내가 대통령 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계속 닉슨이 기소되고 재판이 진행되면, 내가 국가 치유와 통합에 꼭 필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조치들을 결코 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또 닉슨 행정부가 ‘적(敵)’으로 분류해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인물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그는 “머리 속에 담기 힘들 정도로라면, 그 사람은 적이 너무 많은 것”이라고 했다. 최대 1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던, 베트남 전쟁 징병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미국 젊은이들에 대한 사면도 단행했다.
포드가 닉슨을 ‘봐주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포드는 닉슨이 수천 박스에 달하는 대통령 문서와 테이프를 “사유물”이라며 자신의 거처가 될 캘리포니아로 가져가려고 하자, 이 기록물이 백악관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아직 대통령기록ㆍ자료보존법(1974년)이나 대통령기록물법(1978년)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포드는 워터게이트의 진실을 밝힐 이 자료들을 닉슨이 폐기할까봐 걱정했다. 결국 닉슨은 소유권을 포기했다.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을 통해, 워터게이트에 대한 모든 진실이 이후 파헤쳐졌다.
하지만 포드는 닉슨 사면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취임 초인 1974년 9월 66~71%였던 지지율은 다음해 3월엔 37%까지 내려갔다. 1976년 민주당의 카터와 붙은 미 대선에서 공화당에서 7% 이탈표가 나왔다. 당시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은 대선이 끝난 뒤 “포드는 결코 용서받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평가는 포드의 사면 결정에 더 긍정적이다. 닉슨에 대한 형사 소송이 진행됐으면, 가뜩이나 흔들리던 나라는 더욱 불안정해졌으리라는 것이다.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포드에게 의회골드메달을 수여하면서 “반대파는 그 시대의 격정에 휩싸였지만, 포드의 결정은 나라를 살렸다”고 말했다.
2001년 5월 포드는 보스턴의 존 F 케네디 도서관에서 ‘용기 있는 본보기(Profile in Courage)’상을 받았다. 수여자는 한때 그의 민주당 정적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과거 사건들을 명확히 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우리는 포드 대통령이 옳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닉슨 사면 40주년이었던 2014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때는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지만, 지금은 포드가 옳았다는 것에 대해 거의 보편적인 동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포드의 닉슨 사면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뉴욕타임스는 이후 사과ㆍ정정 보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6년 12월 포드가 죽자 사설과 부음 기사를 통해 “당시엔 매우 인기가 없었지만, 이제 일반적으로 옳았던 것으로 간주된다”며 “미국은 진실을 덮는 것만 아니라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해야 한다. 포드는 사면 이상으로 기억돼야 한다. 한 나라의 악몽을 끝낸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연한 대통령’이었지만, 해외 전쟁과 국내 정치 스캔들로 지친 나라를 치유하는 절차를 시작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소환된 적확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포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1974년 11월 한국 방문 때 주한 미군과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병사가 군통수권자인 그에게 “써(Sir)”라고 부르자, 곧바로 “노, 당신이야말로 써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