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해 선거 캠페인 기간 “취임 첫날(1월 20일)만 빼고는 독재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4년 만에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그날 하루만큼은 ‘독재자’처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겠다는 취지였다. 트럼프가 유세 중 “취임 첫날 바로 한다”고 선언한 공약은 41개, 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명령은 25개 이상이라고 미 언론들은 분석했다. ‘대통령 행정명령’은 의회 입법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대통령 서명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트럼프 2기 정권 인수팀의 캐럴라인 래빗 대변인은 “취임 직후 서명할 행정명령 수십 개를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트럼프는 취임일에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 작전을 시작하겠다고 했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24시간 이내’에 종결시키겠다고 했다. 국제 기후변화 협약인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하고 전기차 우대 및 친환경 정책을 폐지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트랜스젠더 여성(남성이 여성으로 성전환)의 여성 스포츠 출전을 막고, 미성년자의 성전환 수술을 국가적으로 금지하겠다는 공약도 있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의 개방적 국경 정책, 총기 구매 배경 조사 확대 지침 등도 모두 철회시키거나 뒤집겠다는 방침이다. 트럼프는 또 부모의 국적과 무관하게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지 시민권’ 제도를 취임 첫날 끝내겠다고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중 일부는 실제로 대통령의 ‘서명’ 하나로 바로 실행이 가능한 반면, 의회 통과가 필요해 시간이 걸리거나 미국만의 의지로는 이뤄지기 어려운 문제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첫날 실행이 가능한 대표적인 공약이 파리기후협정 탈퇴다. 트럼프는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탄소 배출량을 줄이도록 하는 파리기후협정이 미국의 경제를 해친다며 1기(2017~2021) 때도 파리기후협정을 대통령 직권으로 탈퇴했었다. 트럼프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바이든은 취임 첫날인 2021년 1월 20일 파리기후협정에 다시 가입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 정확히 4년 후 재취임하는 트럼프가 취임 첫날 이를 뒤집을 가능성이 크다.
남쪽 국경 폐쇄, 불법 이주자 추방 작전, 국경 장벽 건설 재개 등 불법 이주자를 줄이기 위한 정책들도 트럼프의 ‘첫날 공약’에 다수 포함돼 있다.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에 해롭다고 판단되는 외국인의 입국을 일시 중단할 수 있다’는 이민 국적법, 국가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선 예산 사용에 대한 의회 승인을 건너뛸 수 있다는 국가 비상사태법 등을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트럼프는 1기 때인 2019년에도 의회가 남부 국경 통제를 강화할 장벽 건설 예산안을 거부하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25억달러를 추가로 확보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유세 중에 2차 대전 이후 발동된 적이 없는 ‘적성국 국민법’까지 동원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전쟁 수준의 급박한 상황에 쓰도록 한 이 법까지 동원할 경우 법적·정치적 공방이 격해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비난해온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바로잡겠다는 조치들도 있다. 여성 스포츠에 트랜스젠더의 참여를 금지하겠다는 공약이 대표적이다. 바이든은 2021년 1월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통해 여성 스포츠에 트랜스젠더가 참여할 길을 열었는데, 이후 경쟁이 불공정하고 복싱 등 격투기 종목은 체력 차이로 인한 부상 위험 등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일었다.
트럼프가 약속한 공약을 실제로 취임 첫날 모두 실행에 옮길 경우 세계 질서가 흔들리고 미국 사회에도 큰 혼란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트럼프가 유세 중 약속한 많은 ‘첫날의 공약’ 중 절차적으로 복잡하거나 외교적 협상이 필요해 실행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24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복잡한 지정학적·외교적 상황을 감안하면 해법이 당장 나오긴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의 경우 트럼프는 “내 취임식 전에 끝내라”라고 했었지만, 협상 타결이 여전히 요원하다. 아울러 ‘출생지 시민권’은 수정헌법 14조에 명시돼 있어 개헌까지 필요한 사안이다. 트럼프는 미 제도에 인종 편견이 내재됐다고 보는 이른바 ‘비판적 인종 이론’을 가르치는 학교에 대해 정부 지원금도 삭감하겠다고 했지만, 교육정책은 주(州) 정부가 관리하기 때문에 연방 정부가 개입할 경우 법적 소송이 예상된다.
☞미국 대통령 행정명령
대통령이 정책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한 정책 수단. 의회의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효력을 갖는다. 미국 헌법 제2조의 ‘행정 권한 허용’ 조항에 근거를 두고 있다. 행정명령이 삼권분립(입법부·사법부·행정부의 권력 분리)의 원칙에 어긋나고 남용된다는 지적도 때때로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1기’ 때 220개, 조 바이든은 취임 첫날 17개를 비롯해 총 140여 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