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는 지난 7일 점심 때 그린란드 수도 누크의 한스 에게데 호텔 식당에서 주민들과 만났다. 트럼프는 아들의 스마트폰을 통해 주민들에게 “그린란드는 정말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고, 그린란드와 전세계를 위해 (이 섬의) 안보가 확보돼야 한다. 당신 주변의 떠 다니는 배들은 좋은 배들이 아니다[중국ㆍ러시아 선박이라는 뜻]. 우리[미국]는 여러분을 잘 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환호했다.
2019년 9월 트럼프가 처음 사겠다고 했을 때, 덴마크 정부와 정치인들은 모두 흥분했다. 덴마크 왕국은 덴마크와 그린란드, 페로(Faroe)제도 3개로 구성돼 있다. 이 중 216만 6000㎢인 자치령 그린란드는 이 3개 영토의 98%를 차지한다. 당연히 2019년 당시 취임 두 달을 넘겼던 지금의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은 “멍청한 소리(absurd)”라고 반응했고, 정치인들은 “만우절 농담이냐”고 비아냥거렸다.
트럼프는 그러자 “예의있게 말하는 방식이 아니다. 미국에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고 응수했고, 며칠 뒤엔 이미 수락했던 자신의 덴마크 국빈 방문 일정을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덴마크는 “무례하고 모욕적이다”고 흥분했다.
지난 7일 트럼프는 자신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가진 취임 전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전세계 안보를 위해 그린란드를 가져야 한다고 다시 말했다. 작년 12월 24일 차기 주(駐)덴마크 미국 대사를 지명하면서 그린란드에 대한 소유ㆍ통제 의사를 밝힌 데 이어, 대통령 당선 뒤 두 번째였다. 이번엔 아예 “사람들은 덴마크가 그린란드에 대해 무슨 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갖고 있더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 안보를 위해 우리는 그린란드가 필요하니까”라고 말했다.
덴마크 왕실은 연말 이후 트럼프의 잇단 그린란드 ‘도발’에, 아예 500년 간 써오던 왕실 문장(紋章)까지 바꿨다. 지난 6일 프레데릭 10세 덴마크 왕은 과거 존속했던 스웨덴ㆍ노르웨이와의 국가연합체인 칼마르 동맹을 상징하는 3개의 왕관을 없애고, 그린란드의 북극곰과 페로 제도의 양들을 부각한 문장을 새로 공개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계속된 ‘흔들기’가 효과를 본 것일까. 이번엔 덴마크 정부의 공식 반응에 약간 차이가 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이번에도 “매각 대상이 아니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우리는 이 지역[그린란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는 러시아 같은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어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린란드 자치정부의 외교와 국방정책을 책임지는 덴마크 정부가 그린란드에서 미국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덴마크 야당 정치인들은 “총리 얘기는 결국 트럼프가 그린란드와 덴마크에 대해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라며, 그의 미지근한 반응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 미묘한 변화에는 덴마크와 그린란드 주민 간 해묵은 갈등, 그린란드의 독립 염원, 그리고 강대국들 사이의 북극권 경쟁 등이 작용하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분석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와 가상의 북극점이 위치한 대륙붕이 해저 산맥으로 연결되는 점을 들어, 북위 66도33분선을 지나는 북극권에 속한 8개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북극권에서의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ㆍ중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북극권에서의 경제 이익을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적의 공격에서 지켜줄 ‘최후의 구원자’ 미국의 대통령 당선인이 갈수록 위협적 언사를 하며 자국을 상대로 “군사적 행동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할 때, 덴마크가 어떻게 강하게 반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애초 그린란드 ‘큰 그림’ 못 보고 주민 차별
사실 덴마크는 땅덩어리만 큰 그린란드를 어찌해야 할지 잘 몰랐다.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면서 2030년 이후에 북극점 서쪽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장 짧게 연결하는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가 1년 내내 그린란드를 지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나, 원유와 희토류 등의 금속 자원이 개발될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리고 이제 북극권과 그린란드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자, 러시아와 중국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최근엔 그린란드 원주민인 이누이트족들을 차별하는 인구 정책을 편 것이 드러나, 주민들과의 골만 깊어졌다. 1960~1970년대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 가임(可姙) 여성의 절반에 해당하는 4500명에 대해 최저 열두살 소녀에 이르기까지 자궁내장치(IUDs)를 삽입했다. 부모의 승락이나 통보도 없었다. 이누이트족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 기간 주민 인구는 상당히 줄었고, 현재 그린란드 전체 인구는 5만6000명이다. 2022년부터 덴마크와 그린란드 정부가 공동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현재 10여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고, 이를 계기로 그린란드에선 “식민 시대의 족쇄”에서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1968년엔 덴마크의 핵(核)반입 부인에도, 핵폭탄 4개를 탑재한 미 공군의 B-52 폭격기가 화재로 인해 이곳의 툴리 미 공군기지(현 비두피크 우주군 기지) 인근에 추락했다.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폭탄의 방사성 물질이 주변 지역에 퍼졌다. 그러나 미국과 덴마크는 대규모 정화 작업을 하면서 이를 주민들에게는 숨겼다.
덴마크는 러시아ㆍ중국의 지정학적 욕심도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다. 2018년 그린란드 정부는 유럽과 미국을 잇는 항공 노선을 개척하기 위해 3개의 공항을 개발하려고 중국 투자가들을 끌어들였다.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의 일환으로, 북극권에 ‘북극 실크로드’ 인프라를 짓고 있는 중국 기업들이 달려들었다. 미국이 이를 알고 덴마크를 강력히 압박했고, 다음해 중국 기업들은 투자를 포기했다.
냉전 시절,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미국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미국은 이곳에서 북극해를 지나는 소련 잠수함을 모니터하고,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경보 체계를 구축했다.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그린란드를 통해 러시아ㆍ중국 잠수함의 북극권 활동을 모니터한다. 덴마크는 지난 10년간 GDP의 1.3~1.6% 밖에 안 되는 국방예산에도 불구하고, ‘그린란드 카드’를 통해 미국의 국방비 증액 요구 압박을 피했다.
◇매년 그린란드 예산의 3분의2 지원
그린란드는 어업이 주(主)산업이지만, 이걸로는 경제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덴마크가 매년 39억 덴마크크로네(약 5억4000만 달러)를 경제원조 한다. 이는 그린란드 정부 예산의 3분의2로, 주민 1인당 거의 1만 달러에 해당한다. 인구의 16.2%가 절대적 빈곤선(1일 수입 1.9 달러 미만) 아래 살며, 자살률(10만 명 당 83명)은 미국(14.21명)의 6배다.
그러나 그린란드의 얼음 밑에 묻혀 있는 원유와 광물질이 앞으로 개발될 잠재력을 고려하면, 현재 이와 관련해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미비하다.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우려해, 외국의 그린란드 투자를 종종 막는다.
2020년엔 미국이 그린란드에 121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려는 계획도 덴마크 여야 정치인들이 모두 반대했다. 물론 이때는 트럼프의 ‘그린란드 구입 의사’ 발언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된 뒤로, 덴마크로선 이 원조의 저의를 의심할 이유가 충분했다.
◇주민의 67.7%는 독립 원해
2019년 1월 조사에서 그린란드 성인 주민의 67.7%는 독립을 희망했다. 무치 B 에게데 자치정부 총리는 트럼프의 구입 의사 발표에 “결코 매각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에게데 총리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독립을 열심히 외쳐왔고, 이미 헌법 초안도 마련됐다.
덴마크 왕실과는 달리,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와의 관계법에 따라서 그린란드 주민이 독립을 원하면 이를 허용한다는 방침이다. 덴마크 여론지도층 대부분의 생각은 그린란드가 이미 자치국가이기 때문에, 덴마크로선 ‘갖고 있지 않는 것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린란드가 ‘독립’이 아니라, 다른 큰 나라의 ‘일부’가 되기를 원치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구입 의사는 ‘독립’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에게데 자치정부 총리는 “우리 관심은 우리의 미래와 독립 쟁취다. 덴마크인과 미국인이 무슨 의견을 내든, 우리는 이런 외압 때문에 우리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린란드는 외부의 투자, 특히 미국의 투자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린란드 정부로선, 트럼프의 덴마크 압박을 ‘독립’의 기회로 잘 활용해 보겠다는 생각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