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정부 1기 때 백악관 국장을 지냈고, 트럼프 당선인과 부부가 막역한 사이인 머르시디스 슐랩 미국보수주의연합(ACU) 의장이 지난 7일 한국의 탄핵 정국을 언급하며 동북아의 지정학 구도가 재편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ACU는 1964년 설립된 미국 최대 보수 성향 시민단체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여러 차례 행사를 찾아 연설했을 정도로 각별한 관계다. 한국계 영 김 공화당 하원의원을 제외하면 아직 제도권 정치인 중 한국 상황을 언급한 인사는 없지만, 적어도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만큼은 한국의 계엄·탄핵 상황에 비상한 관심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슐랩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쿠바계 미국인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 대선 캠프와 백악관에서 일했다. 워싱턴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다 트럼프 1기 때인 2017년 9월~2019년 7월 백악관 전략커뮤니케이션 국장을 지냈다. 남편인 맷 슐랩 ACU 공동의장 역시 트럼프에 막역하게 조언할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이 때문에 트럼프 1기 때는 부부가 정가의 ‘파워 커플’로 꼽혔는데,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시대 워싱턴의 잇 커플(It Couple)”이라고도 했다. 슐랩 부부가 설립한 로비 회사의 1호 고객이 보수 진영의 큰 손으로 오랜 기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코흐 형제의 ‘코흐 인더스트리’였다. 트럼프 1기 때 개국 공신으로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도 최근 자신의 방송에서 한국 상황을 다루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주한미군의 불안정, 나아가 한미동맹의 위기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을 짚었다.
슐랩이 진행하는 이날 방송에선 강경 보수·반(反)중국 성향으로 이사회 일원이기도 한 고든 창 변호사가 패널로 출연했다. 슐랩은 최근 배우자가 이웃 국가인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언급하며 “우리는 당연히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인들이 왜 걱정해야 하고, 미국이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창 변호사는 “한국의 좌파 정당인 민주당이 모든 입법을 차단하고 여러 인사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언한 것은 도를 넘은(overreach) 일이었지만, 그 이후 야당이 난동(rampage)을 부리고 있다. 자신에 주어진 의무·책임을 다하고 있던 권한대행(한덕수 국무총리)을 탄핵했고, 두 번째 권한대행(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한 탄핵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창 변호사는 탄핵 정국 속 유력한 차기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가차 없는 좌파 인사(relentless leftist)’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가 범죄 혐의를 받아 기소된 상태인 점을 언급하며 “대선에 출마하지 못할 수도 있어 자신에 대한 판결이 나오기 전에 윤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질주(race)하고 있다”고 했다. 슐랩은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탄핵 찬반 집회에 대한 사진을 봤다고 언급하며 “솔직히 말해서 중국·북한은 좌파 정당을 당연히 지지하는 것 같고 미국의 위대한 동맹인 일본, 대만은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있다” “이번 일이 지정학적 관점에서 (지역의) 모든 역학 구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데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창 변호사는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윤 대통령은 원래 매우 인기가 없었는데 20%도 안 되던 지지율이 지금은 40%로 뛰었다. 나도 윤 대통령이 한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좌파의 난동이 더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앞서 민주당 등이 지난달 국회에 제출한 탄핵 소추안에 “북·중·러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를 했다”는 문구가 탄핵 사유로 언급돼 미 조야(朝野)에서 우려가 적지 않았다.
슐랩 부부가 이끄는 ACU는 매년 2월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州) 내셔널 하버에서 보수 진영의 ‘정치 수퍼볼’이라 불리는 보수정치행동회의(CPAC)를 주최한다. 공화당 의원부터 보수 싱크탱크, 대학생까지 모여 3박 4일 동안 보수의 오늘과 내일을 주제로 토론하는 보수 진영의 빅 이벤트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 이곳을 찾아 약 1시간 30분 동안 연설했다. 슐랩 부부에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며 “ACU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상식으로 똘똘 뭉친 곳”이라고 했다. 올해 2월에도 트럼프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CPAC을 찾아 연설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맷 슐랩은 지난 2019년 방한해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사분오열해있던 한국의 보수를 향해 “‘같은 편이라면 마땅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정치를 도덕화하는 순간 연대(coalition)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보수’라는 방에 다 같이 있다면 어느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