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미(카터 전 대통령)가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 장례식이 9일 워싱턴DC 국립 대성당에서 엄수됐다. 카터에 대한 애도 분위기만큼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조 바이든 대통령, 버락 오바마·조지 W. 부시·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 5명이 총집결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대선에서 경쟁했지만 분패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지지층 의사에 반한 행동을 했다가 지금은 사실상 팽을 당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한 앵글 안에 있었다. ‘국가 애도의 날’인 이날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카터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특히 생전에 카터를 ‘최악의 대통령’이라 비판한 트럼프는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넥타이를 메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AP 등은 “극도로 분열된 미국 정치에서 목격된 이례적 화합의 모습”이라고 했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이날 장례식 전에 비공개로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트럼프가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생존한 전·현직 대통령들의 비공식 모임인 이른바 ‘대통령 클럽’과 만남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카메라에는 붙어 앉은 트럼프와 오바마가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됐다. 트럼프는 과거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출생 음모론에 불을 지폈던 인물이고, 오바마는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적’으로 규정해 경합주를 다니며 해리스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2021년 당연직 상원의장(부통령)으로 트럼프가 패배한 대선 결과를 인증해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던 펜스도 트럼프와 웃으며 악수를 했다. 미 언론들은 “아마도 4년 만에 처음 조우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펜스 배우자인 카렌은 트럼프 부부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또 더힐은 “바이든·해리스가 서로 인사하지 않았고, 해리스가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2018년 12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이후 5년 만에 진행된 이날 국장(國葬)은 예포 21발과 함께 의회 의사당에 안치돼 있던 관을 북서부 성당으로 운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장례식에선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이 생전에 쓴 추도사를 아들들이 낭독했다. 포드는 1976년 대선에서 카터와 승부를 겨룬 한때 정적(政敵)이었지만 카터가 임기를 마친 후엔 두 사람이 당파를 초월한 우정을 보여주며 여러 사회 현안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포드의 막내 아들이자 배우인 스티븐 포드는 대독한 추도사에서 “카터와 나는 짧은 기간에 라이벌이었으나 이는 오랜 우정으로 이어졌다”며 “재회를 기대한다. 우리는 서로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카터와 반세기 가까운 인연을 맺은 바이든은 생전 카터의 부탁으로 이날 추도사를 했다. 자신이 대선에 출마한 카터를 지지했던 이유로 ‘변하지 않는 인격’을 꼽으며 “카터와의 우정을 통해 훌륭한 인격은 직함이나 우리가 가진 권력 이상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장 큰 죄악인 권력 남용에 맞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바이든은 이날 장례식 도중 눈물을 보였다. 카터의 손자인 제이슨 카터는 가족을 대표해 무대에 올라 “정치 인생과 대통령직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라 예언적이었다”며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을 때도 자신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었다”고 했다. 카터의 관은 국장 이후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되는 보잉 747기를 통해 고향인 조지아주(州) 플레인스로 다시 운구됐다. 77년을 해로했고 2년 전 먼저 세상을 뜬 배우자 로절린 여사 옆에 안장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