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의원 7명이 20일 열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18일 출국한다. 국민의힘에선 김석기·윤상현·인요한·김건, 더불어민주당에선 조정식·김영배·홍기원 의원이 각각 참석한다. 비상 계엄·탄핵 정국 속 여야가 극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모처럼 동수(김석기 위원장 제외)를 맞춰 미국을 찾는 것이다. 국민의힘에선 외통위와는 별개로 나경원·김대식·조정훈 등 일부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기간 트럼프는 고사하고 트럼프 정부 실력자를 상대로 하는 유의미한 ‘의원 외교’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취임식 장소인 의회 의사당이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워싱턴의 상징인 555피트(약 170m) 높이 기념탑을 배경으로 취임식 참석을 인증하는 사진만이 남을 뿐이다. 국내 선전용 성격이 큰 것이다.
이는 미 대통령 취임식이 철저히 국내 행사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트럼프 취임식에 초청받았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국무부 기록을 보면 1874년 이래 대통령 취임식에 외국 정상이 공식 방문한 적이 없다. 물론 올해는 트럼프 측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 일부 정상을 취임식에 초청한 사실을 확인해 경우가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상당수는 외교 경로를 통한 공식 초청이 아니었고, 실제로 참석 의사를 밝힌 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날 우리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 1500여 명 정도 들어가는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건 조현동 주미대사 부부가 유일하다.
의원들이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는 건 좌석표가 일찌감치 상·하원에도 배분이 됐기 때문이다. 의회 합동취임식준비위원회(JCCIC)에 따르면 약 22만장의 초정장이 배포됐다고 한다. 대부분은 지역구민에게 나눠주는데 친분이 있는 외국 의원이나 그 지역에 투자한 기업인 등에도 일부 교부한다. 지난달 트럼프 자택인 마러라고를 찾았고, 장남인 주니어로부터 직접 초청을 받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을 제외하면 ‘취임식에 초대됐다’고 홍보한 기업인 상당수가 이런 케이스에 해당한다. 다만 이 좌석은 트럼프가 취임 선서를 하게 되는 의회 의사당에서 최소 100m 이상 떨어져 있고 단차(段差)도 상당하다. 여기에 지난 5~6일 폭설 이후 최근 워싱턴의 날씨가 낮에도 영하에 근접하는 추위를 자랑하고 있어 의원들이 한파 속 조악한 간이 의자에 앉아 얼마나 오래 현장을 지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과거 취임식 참석 경험이 있는 한 인사는 “한국에서 손님들이 왔는데 추위에 덜덜 떨고 있다면 대사의 마음만 불편할 것”이라고 했다.
취임식 기간을 전후한 워싱턴 환경도 의원 외교를 하기에는 극악의 난도를 자랑한다. 이 기간 대부분의 도로 교통이 통제되고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기 때문에 이동이 용이하지 않은 탓이다. 워싱턴 시내에선 대통령이 특정 장소를 찾으면 주변 2~3블럭을 통째로 바리케이드로 차단해 버리는 경우가 잦다. 최악의 경우 의원단이 탑승한 차량 등이 발이 묶여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시내 대부분 호텔·레스토랑은 이미 예약이 마감된 상태고, 일부 숙박 시설은 1박에 수천 달러를 부르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상·하원의원들과 면담을 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마저도 사진을 찍는 요식 행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여당이 된 공화당 소속 의원들 입장에선 전국에서 집결한 자국 내 인사들과 교류하고, 정부 주요 직위 내정자들에 줄을 대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취임식이 끝나면 상·하원의원들과 오찬을 갖는다. 의회 관계자는 “미국의 주요 우방국 중 국회 상임위 차원에서 한국 정도 규모의 방미를 추진한 나라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일부 의원이 참석한다는 만찬 역시 취임식 밤 워싱턴 곳곳에서 열리는 수많은 부대 행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트럼프와 멜라니아 여사가 춤을 추는 공식 취임 무도회 이후 대통령 부부가 이른바 ‘볼(ball)’이라 불리는 행사장을 여러 곳 순회하게 된다. 각 행사에 머무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시간이 촉박하면 트럼프가 무대에 올라 5분만 손을 흔들다 사라질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앞줄에 앉은 일부 인사들과 사진 정도는 찍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트럼프 부부 마음에 달린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한 만찬장에 수백, 수천 명이 몰려있기 때문에 트럼프와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거나 실력자들과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는 어렵다. 이는 최근 방한한 폴 매너포트 전 트럼프 캠프 선대본부장(2016년)으로부터 만찬 등 4개 공식 행사를 초대받았다는 홍준표 대구시장도 마찬가지다. 매너포트가 트럼프와 가까운 인사인 건 맞지만 그는 과거 ‘러시아 스캔들’ 당시 돈세탁·금융 사기 혐의로 기소돼 4년형을 받았다. 트럼프가 곧바로 사면했지만 많은 논란이 있는 인사라 다시 제도권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워싱턴 정가의 시각이다.
상황이 이러니 만만한 싱크탱크들에 의원들의 면담 및 면담 주선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고위급이 워싱턴을 찾으면 관성적으로 순회하는 곳들로, 상당수는 우리 정부·기업이 ‘대미(對美) 아웃리치’라는 명분을 앞세워 적게는 수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백만 달러까지 지원하는 곳들이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2기 출범을 맞아 진짜 줄을 대고 싶다면 여야가 합의해 외교 당국만큼은 전폭적인 재신임을 해주는 것이 차라리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대사관은 트럼프 당선 직후인 지난해 말 트럼프 이너서클에 닿을만한 로비 업체 2곳을 추가로 고용했다. 한 달짜리 ‘원 포인트’ 계약이었는데 비상 계엄 선포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로 한국 내 정치 상황이 꼬이고 고위급 방미가 전면 중단되면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장 트럼프가 취임해 관세·방위비 등 한국에 ‘폭탄’이 될 만한 현안을 던질 경우 누가 카운터파트가 돼 이를 상대할 것인지도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