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고성능 인공지능(AI) 반도체인 H100. /엔비디아

중국에 대한 고성능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해온 미국 정부가 일부 초고성능 AI(인공지능) 모델의 사용을 추가로 제한하는 조치를 13일 발표했다. 중국·러시아 등 ‘적성국’으로 분류한 22국에 대한 초고성능 AI 모델 수출 차단이 이번 조치의 핵심이다. 챗GPT를 개발한 미국 오픈AI 등이 만든 폐쇄형(프로그램이 공개되지 않은) 초고성능 AI 모델이 대상이며, 한국을 비롯한 미 우방 18국은 지금처럼 제한 없이 해당 AI 모델을 확보할 수 있다. 미 정부 차원에서 중국에 대해 AI 모델에 대한 사용 규제 조치를 내린 것은 처음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이날 ‘첨단 AI 기술의 책임 있는 확산’이라고 명명한 추가 규제의 취지에 대해 “신뢰 가능한 기술 생태계를 세계 모든 곳에 구축하고 (초고성능) AI와 관련한 국가 안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조치”라고 말했다. AI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무기 개발, 사생활 감시, 사이버 공격 등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데, 이런 기술이 중국 등 미국이 적대적으로 보는 국가로 흘러들지 않도록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美, 적대국 아닌 ‘기타 국가’에도 반도체 수출 제한

이번 조치에서 미국은 전 세계 국가를 우방국·적성국·기타국 등 3등급으로 나눴다. 최상위인 우방국엔 한국을 비롯해 일본·대만·네덜란드·영국·독일·프랑스 등 18국이 포함됐다. 이들 국가는 AI 반도체와 초고성능 AI 모델을 추가적인 제한 없이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중국·러시아 등 22국은 모든 AI 반도체와 폐쇄형 초고성능 AI 모델에 대한 접근이 사실상 차단된다. 미국은 그동안 엔비디아·AMD 등 미국 기업이 개발한 AI 반도체를 중국 등 적성국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해왔는데, 여기에 추가로 초고성능 AI 모델 수출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백악관은 이날 별도로 배포한 자료에서 “강력한 AI 시스템은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사이버 공격, 감시 등 국가 안보의 중대 위험을 초래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며 “미국은 ‘악의적 행위자’들의 공격 앞에서 단호히 행동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미국의 안보와 경제를 위해서는 AI라는 핵심 기술을 외국에 위탁하지 않는 한편 전 세계 AI가 미국의 ‘철로(rail)’ 위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날 적대국에 대한 제한 조치를 넘어, 동맹국이 아닌 ‘기타 국가’에 대한 반도체 수출 제한 조치도 새롭게 도입했다. 기타 국가에 미국이 수출할 수 있는 반도체의 ‘총연산력’에 상한을 설정하는 방식이다. 최첨단 AI 반도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반도체인 H100을 기준으로 ‘2년간 32만개’에 해당하는 연산력이 상한으로 설정됐다. 반도체의 개수가 늘어나 ‘총연산력’이 커질수록 AI의 성능은 좋아진다. 우방국만큼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국가들에 미국의 첨단 반도체가 많이 흘러들어가 중국 등에 재수출되는 것을 제한하려는 의도다.

트럼프 2기 'D-6'… 취임식 사전 연습하는 군악대 - 12일 미국 워싱턴 DC 의회의사당 앞에서 미 육군 군악대가 20일 열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에서 펼칠 공연의 사전 연습을 하는 모습. 트럼프의 취임식이 약 1주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임기가 곧 종료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인공지능(AI)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하는 등 숙원 정책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 정부는 또 미국 반도체를 이용해 ‘기타 국가’가 자국이나 제3국에 데이터센터를 지을 경우, 미 정부가 보안 기준이 충족된 기업·기관에 부여하는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자격을 ‘특정 지역’마다 매번 승인받도록 했다. 데이터센터는 AI 개발에 필수적인 시설이다. 동맹국의 경우 한 차례 VEU 자격을 부여받고 적성국을 제외한 국가에 데이터센터를 비교적 자유롭게 지을 수 있지만 지역 안배엔 제한을 두도록 했다. 미국·동맹국에 총 데이터센터 반도체의 75%를 두어야 하고, 자국을 제외한 특정 국가에 전체의 7%를 넘는 반도체를 배분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번 조치는 오는 20일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바이든 정부의 마지막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다. 바이든 정부는 2022년 10월 이후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를 잇달아 발표했고, 지난 10개월 동안 국내외 여러 주체와의 협의를 거쳐 마지막 규제를 마련했다. 다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세히 관리를 받으면서까지 미국 반도체를 구매하고 싶지 않은 국가와 미국 간에 갈등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했다. 또 해외 입지를 강화하려는 대형 IT 기업들의 반대도 크기 때문에 빅테크 기업 관계자가 다수 포진한 트럼프 정부가 이번 조치를 그대로 시행할지는 미지수다.

중국 산동성의 한 반도체 생산시설. /AFP 연합뉴스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장악한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MS)·오러클 등 미 기업들은 전례 없이 범위가 넓고 복잡한 규제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기술 지배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미국산 반도체를 수입 못 하게 된 다른 나라들이 중국에서 AI 관련 반도체·기술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이는 중국 반도체·AI 산업의 성장을 자극해 미국을 따라잡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우려도 나온다. 앞서 엔비디아는 “세계 대부분에 수출을 제한하는 규정이 (AI 반도체) 남용 위험을 줄이기는커녕 경제 성장과 미국의 지배력을 위협하는 중대한 정책 전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켄 글릭 오러클 부회장도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수출 통제에 “미국 기술 업계를 타격한 역대 가장 파괴적인 규제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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