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지명자가 14일 미 연방의회 상원 군사위원회의 인사청문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 EPA 연합뉴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방 장관으로 지명된 피트 헤그세스 후보자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해 논란이 일고 있다.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정부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변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헤그세스는 14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인사 청문회를 위해 제출한 사전 서면 답변에 “북한의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미사일 사거리 확대, 증가하는 사이버 역량은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 글로벌 안정에 모두 위협”이라고 답변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해온 미 정부는 그간 북한에 대한 ‘핵보유국’이라는 표현을 자제해 왔다.

1968년 체결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른 국제법상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은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5국이다. 헤그세스가 북한을 가리켜 사용한 ‘핵보유국’은 국제법상 공식 지위는 아니며, 비공식적으로 핵무기 기술을 보유하거나 활용하는 국가까지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석된다. 한 외교 당국자는 “NPT에 가입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국제법 밖에서 핵개발을 하는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이라며 “NPT에 따른 핵무기 보유국처럼 핵개발 지위를 인정받은 국가와 구별하기 위해 ‘핵능력 보유국’으로도 번역된다”고 했다.

◇헤그세스 “동맹 방위비 분담 높여야”

북한은 NPT에 가입했다가 2003년 멋대로 탈퇴한 후 불법으로 핵무기를 개발 중인 국가다. 미국은 이런 행태를 용인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며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부르길 꺼려왔다. 북한의 핵개발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준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날 청문회 현장에선 관련 질의가 나오지 않아 헤그세스가 이 표현을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0여 년간 방송 진행자로 일해온 그가 핵 문제에 대한 쟁점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헤그세스의 답변이 알려진 후 한국 정부는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으며, 미국 등과 함께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겠다는 원칙을 다시 강조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15일 취재진 질의에 “북한 비핵화는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일관되게 견지해 온 원칙으로 NPT상 북한은 절대 핵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미 백악관도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존 커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14일 취재진 질문에 ‘핵(nuclear)’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차기 안보팀이 그것(북핵)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해 내가 말할 수는 없다”면서도 “미국은 이를 인정(recognition)하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한편 헤그세스는 “동맹국의 국방비 지출 증대와 부담 공유는 우리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하다”고 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2%대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의 국방비 지출을 5%까지 올리라고 주장한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강조한 것이다. 이 기조에 따라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과거 폭스뉴스 진행자로 일하며 트럼프를 직접 인터뷰하기도 한 헤그세스 후보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육군 예비군 소령 출신으로, 최고위 장성들이 장관을 맡아 이끌어온 국방부의 수장이 되기에는 경력이 일천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를 의식한 듯 헤그세스 후보자는 청문회 모두 발언을 통해 “펜타곤(국방부)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리는 게 내 임무”라며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를 재건하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2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된 마이크 왈츠 공화당 하원 의원도 증인으로 나와 “헤그세스는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방부 본부가 아닌 최전방에서 싸운 장교 출신 첫 국방 장관으로서 시각을 제시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4시간 넘게 진행된 청문회에서 민주당은 그의 과거 성폭행 논란, 과음 문제, 불륜 의혹 등을 제기하며 신상 문제를 파고들었다. 헤그세스는 2017년 캘리포니아의 한 호텔에서 여성을 성폭행하고 합의금을 지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민주당 팀 케인 상원 의원은 “(헤그세스가) 2017년 두 번째 아내와 이혼 전이었는데, 세 번째 아내가 될 여성과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돼 바람을 피웠다”고 했다.

반면 공화당의 마크웨인 멀린 상원 의원은 “아내를 속여 이혼한 상원 의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그들에게 사퇴하라고 했느냐”며 민주당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멀린 의원은 과음 상태의 헤그세스 후보자가 과거 술집에서 “모든 무슬림을 죽여라”라고 말했고, 스트립바에서 성추행 의혹이 제기됐다고 민주당이 주장하자 “밤에 술 취한 채로 투표하러 오는 상원 의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고도 했다. 헤그세스 후보자 역시 “익명의 허위 주장에 기댄 좌파 언론들의 조직적 비방”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성폭행 의혹에 대해 “합의된 관계였고 수사 결과 무혐의 결정을 받았다”며 “좌파 언론은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공식·비공식 핵보유국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핵무기 제조 및 운용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한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을 공식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이라고 한다. 이후 자체 핵실험으로 사실상 핵무기 기술을 확보했다고 인정받는 나라들은 비공식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하며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