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새 대통령 취임식(1월20일)을 5일 앞두고 15일(미국 시간) 이스라엘과 테러집단 하마스가 전격적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곧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서로 자신의 공(功)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미국과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발표가 나기도 전인 15일 낮 12시24분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트루스 소셜에 “이 엄청난 휴전 합의는 오직 (작년) 11월에 우리가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라며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많다. 자신이 지명한 중동 특사인 스티븐 위트코프가 바이든의 중동 협상팀에 합류해 함께 일했고, 지난 7일에도 “내 취임식 전에 인질이 풀려나지 않으면, 지옥이 터질 것”이라고 하마스에 경고했다. 트럼프는 당시 “위트코프가 카타르의 도하에서 이스라엘, 우리 우방국들과 면밀하게 일하면서 가자(Gaza)가 더 이상 테러범들의 천국이 되지 않도록 확실히 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휴전 합의 발표를 한 바이든 대통령은 “멈추지 않는 나의 외교적 노력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며 “이번 합의는 레바논 휴전과 이란의 세력 약화로 인해 하마스가 받고 있는 극도의 압력뿐 아니라, 끈질긴 미국 외교의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이번에 받아들인 휴전 조건은 사실 작년 5월 바이든 행정부가 제시한 안(案)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고, 이 안을 놓고 바이든 협상팀은 힘겨운 협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구 공(功)이냐” 질문에, 바이든 “농담하나?”
바이든 대통령은 회견 말미에 트럼프와 바이든 둘 중에서 “누구의 공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그거 농담이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실상은 정치적으로 앙숙인 두 사람이 서로 품은 적의(敵意)를 제쳐놓고, 15개월을 끈 최악의 이스라엘ㆍ하마스 전쟁을 끝내고 7명의 미국인 인질을 포함한 98명의 인질을 석방하기 위해 초당적인 외교 노력을 한 결과로, “두 대통령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과 외교분석가들은 평가했다.
트럼프의 중동 특사이자 뉴욕시의 억만장자 부동산 개발업자 스티븐 위트코프와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조정관인 브렛 맥거크는 작년 11월 대선이 끝난 뒤 서로 만나서 계속 휴전 협상 상황을 공유했다.
백악관 대변인 존 커비는 “맥거크와 위트코프는 하루에도 수차례 대화를 했고, 위트코프가 일부 세밀한 부분에선 합의를 이끌어냈다. 대단한 협력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애틀랜틱 카운실의 중동 전문가인 조너선 패니코프는 AP통신에 “외교정책에서조차 종종 당파적 경쟁이 극에 달하고 있지만, 초당적 노력이 가해질 때 미국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11일 트럼프 특사가 네타냐후 만날 때
트럼프 중동 특사인 위트코프는 지난 11일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탸나후 총리를 방문해, 휴전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이스라엘 측은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인질 1명 당 풀려날 팔레스타인 테러범 수감자 숫자가 너무 많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위트코프는 이것이 트럼프가 원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네타냐후는 또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강력한 지지 기반인 보수 세력을 위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작년 10월, 미국 대선 전부터 “내 취임식 전에 전쟁을 끝내라”고 네타냐후에게 수차례 통화에서 경고했었다.
위트코프가 네타냐후를 만나는 동안, 바이든의 중동 특사인 맥거크는 카타르 도하에서 휴전 협상의 마지막 라운드를 이끌고 있었다. 그 역시 네타냐후에게 동시에 전화를 해,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뉴욕타임스는 “현 대통령과 다른 정당의 차기 대통령에 속한 팀이 미국인 인질들의 운명과 처참한 전쟁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순간에, 이처럼 함께 일한 적은 거의 드물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이제 전쟁은 끝나야 하고, 인질은 풀려나야 한다’는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난 7일 트럼프는 자신의 마러라고 플로리다주 리조트에서 기자들에게 “내 취임식 전까지 인질들이 풀려나지 않으면, 협상을 해치려는 생각은 없지만 모든 지옥이 터져 나올 것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말한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그때도 트럼프의 중동 특사인 위트코프는 트럼프 곁에 서서 “(바이든 특사인) 브렛이 협상을 이끌고 있다. 마무리되기 직전이다. 왜 지연되는지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부정적인 전망을 할 시점이 아니다. (현) 대통령이 기대하고 꼭 지켜야 한다고 제시한 레드라인(red line)을 따라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
위트코프는 트럼프의 절친으로, 작년 11월 이후 카타르에서 협상 진행 상황을 지켜봤다. 바이든 행정부가 합의를 이끌어내도,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이 확실히 휴전 합의 내용을 지키도록 집행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바이든, 협상 부진에 트럼프 팀 ‘합류’ 수용
휴전은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미 대통령 직을 넘기기 전날인 19일부터 발효된다. 바이든으로선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을 자신의 재임 중에 끝냈다는 ‘업적’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바이든은 공(功)의 일부를 트럼프 진영에도 돌렸다. 그는 “이번 딜은 우리 행정부가 주도해서 협상했던 것이지만, 합의 조건들은 차기 행정부에서 실행될 것이다. 지난 수일 동안 우리[바이든과 트럼프 협상 대표]는 한 팀으로 한 목소리를 냈다”고 말했다.
바이든의 ‘현명한 판단’도 한몫을 했다. 그는 반년 넘게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트럼프와 그의 중동 특사 위트코프가 협상 테이블에 합류하는 것을 용인했다. 현직과 차기 미국 대통령이 전략을 공유하면서, 하마스와 이스라엘 모두에 압력을 가하는 태도를 취했다.
중국의 도발과 우크라이나 전쟁, 북한 등 수많은 외교 과제를 안고 있는 트럼프 역시 취임 후에 일단 이들 이슈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휴전 합의에, 바이든보다 트럼프에 먼저 감사한 네타냐후
트럼프가 곧 권좌로 돌아오고 “모든 지옥이 터질 것”이라는 엄포는 분명히 네타냐후와 하마스 양쪽의 계산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마스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합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네타냐후는 그동안 자신이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받은 막대한 지원을 생각하며, 트럼프 집권 2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둘 사이의 역학 관계를 잘못 읽었다.
네타냐후는 2020년 미 대선이 끝난 뒤에, 각국 지도자 중에서 제일 먼저 바이든에게 ‘당선 축하’ 통화를 했다. 트럼프는 이후 액시오스 매체 인터뷰에서 “바이든을 제일 먼저 축하한 사람이 네타냐후라니.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해줬는데…잠자코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아주 멍청한 실수를 했지”라며 “f**k him”이라고 대놓고 욕했다.
트럼프는 작년 4월에는 애초 하마스의 기습 테러가 발생한 것과 관련해 “네타냐후는 (기습을 알리는) 모든 사인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당연히 비난 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네타냐후는 더 이상 전쟁을 질질 끌다가는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당연시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트럼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취임 전에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네타냐후는 15일 휴전 합의가 발표된 뒤, 먼저 트럼프에게 감사 전화를 했고 이어 바이든에게 전화했다. 네타냐후는 이후 발표된 성명에서도 트럼프에게 “인질 석방을 도와줘서 수십 명의 이스라엘 인질 가족들에게 고통을 멈추게 한 데 감사”하고, “가자 지구가 더 이상 테러리스트들의 천국이 되지 않도록 이스라엘과 협력하겠다”는 그의 이전 발언에도 감사한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선 성명의 네 번째 문장에 가서야 “인질 석방 딜에 대해 역시 감사한다”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