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 유방암 환자 A씨는 지난해 겨울 서울의 한 대형 병원에서 유방암 1기 진단 후 수술받고 건강을 되찾았다. 초기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발견이 어렵다는 유방암을 빨리 찾은 비결은 가족력 때문에 참여한 임상 시험 덕분이었다. 자매가 유방암에 걸린 뒤 유방암 발병을 걱정하게 된 A씨는 혈액 속에 떠다니는 암 조각 유전자를 찾아내 조기 암을 진단하는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거기서 유방암 위험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자 서둘러 병원을 찾아 정밀 검진을 받았던 것이다.
A씨가 참여한 임상 시험은 ‘액체 생검(Liquid Biopsy)’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진단 기술이다. 이제는 임상 단계를 넘어 최근 국내에서도 상용화된 이 기술은 소량의 혈액만으로도 다양한 암(癌)을 한 번에 진단 가능하고, 암의 진행 과정이나 치료 효과까지 확인할 수 있어 암 진단의 신기원으로 여겨진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는 액체 생검을 ‘10대 미래 유망 기술’ 중 하나로 꼽았다.
◇미세 암 찾아내는 ‘액체 생검’
그간 암 진단의 표준 방법은 ‘조직 생검’으로, 내시경이나 바늘 등 외과적 수술 도구를 이용해 암이 의심되는 장기 조직 일부를 떼어내고, 현미경으로 분석하는 방식이었다. 조직 생검은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줄 뿐 아니라 감염이나 내부 출혈 위험이 있고, 검사 후 회복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또 종양 위치나 크기, 고령 등 환자 상태에 따라 시행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CT(컴퓨터 단층 촬영)나 MRI(자기 공명 영상), 초음파 같은 영상 검사도 있지만, 아주 미세한 암은 발견이 어렵다.
액체 생검은 이런 기존 진단법의 한계를 대폭 보완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액체 생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혈액 생검은 채혈만 하면 되니 조직 생검에 비해 위험 부담이 없다시피 하다. 암세포에서 떨어져 나와 혈액 속을 떠다니는 종양 세포(CTC)나 유전자 조각(ctDNA)을 추출하고, 첨단 유전자 분석 장비(NGS)와 인공지능(AI) 기술 등을 통해 유전체 변이를 분석해내는 방식이다. 김태유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현재는 200방울 정도 되는 혈액 10cc로 암을 진단하고 있다”며 “암 치료 전 액체 생검으로 종양 세포 양을 재고, 치료 후 그 변화를 보고 암 치료 효과를 판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대 8가지 암 동시 진단
액체 생검 등장 배경에는 발전된 유전자 분석 기술이 있다. 가령, 초기 암은 크기가 매우 작다 보니 혈액 속 ctDNA 양 역시 0.001% 미만 수준으로 적다. 극소량의 유전자 조각을 혈액에서 분리해내고 분석하는 기술이 2000년대 들어 급격히 발달하면서 액체 생검 역시 가능해진 것이다. 정확도는 높은 편이다. 암 완치 후 재발을 판독하는 정확도는 50~60% 수준이고, 조기 진단 정확도는 80~90%에 달한다.
현재 국내에 시판된 혈액 생검 기술은 최대 8가지 암 종류를 동시에 진단받을 수 있다. 대장암과 위암, 간암, 췌장암, 폐암, 유방암, 난소암, 전립선암이 해당한다. 액체 생검은 국내 주요 종합병원이나 일부 검진센터 등을 통해 받을 수 있다. 다만 아직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용은 진입 장벽이다. 전문가들은 암 가족력이 있거나 암 발병 여부를 조기에 확인하고 싶은 사람, 기존 암 검진에서 문제가 있어 추가 검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액체 생검을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