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안컵 준결승전 전날 벌어진 손흥민·이강민의 다툼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두 선수 모두 기량이 출중하고, 인성도 훌륭했다고 생각해온 터라 더욱 그렇다.

지난 7일(한국시간) 패배한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요르단과의 준결승전에서 손흥민과 이강인의 모습. 전날 저녁 두 선수는 심하게 다퉜다. /연합뉴스

사실 세상만사 갈등과 불화를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인품이 좋은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살다보면 갈등과 다툼은 일어나는 법이다.

운동선수들 간에 이같은 다툼은 옛날 같았으면 안에서 자체적으로 조용히 끝났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사소한 말 한마디, 해프닝도 삽시간에 전파되고 주변 모든 사람들이 훈수꾼이나 심판자가 돼 관여한다.

더구나 이 두 사람은 세계적 ‘셀럽(Celeb)’이다. 지구촌 축구팬들이라면 중요한 국제경기 전날 벌어진 두 월드스타 간의 다툼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 어느 한쪽이 잘못했더라도 쉽게 물러서거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도 어려운 판국이다.

손흥민이 인성면에서도 워낙 검증된 사람이라 일반 여론은 압도적으로 주장 손흥민 편이다. 그렇다면 이강인은 왜 그랬을까. 10여년 대선배이자, 팀의 주장이요, 한국인의 우상이랄 수 있는 손흥민의 훈계(“경기 전날 탁구 등 개인적 행동 자제하라”)에 정면으로 맞서고 주먹까지 휘둘렀을까. 그처럼 자제력이 약하고 인성이 못된 것인가.

2022년 9월 20일 국가대표 평가전을 앞두고 파주트레이닝센터에서 함께 훈련하는 손흥민과 이강인의 모습. 이때만 해도 두 선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조선DB

# 내가 기자생활을 마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기자의 주임무는 ‘사실 찾기(fact-finding’)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실 찾기(truth-finding)’라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주 들은 사례가 있었다.

‘힘이 약한 A라는 학생과 힘이 센 B라는 학생이 있었다. 평소 B는 A를 늘 괴롭혔다. 결국 참다못한 A가 B를 향해 주먹을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그 장면을 담임선생님이 보았다. 그것만 놓고 보면 A가 폭력을 휘두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일까?”

이 케이스를 가지고 손흥민-이강인 경우를 대입해보면 이강인이 손흥민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은 맞다. 그렇다면 이강인이 늘 당하던 A이고, 손흥민이 늘 괴롭히던 B일까. 그래서 이강인이 평소 자신을 괴롭히는 손흥민에게 쌓인 감정이 반항과 주먹으로 발전됐는가?

이를 형사사건으로 본다면 수사기관서 판정은 간단하다. 전후사정 볼 것 없이 누가 피해를 입었느냐는 것으로 따진다. 손흥민이 손가락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손이 피해자고 이가 가해자다.

그러나 진실 찾기 입장에선 무의미하다. 대학 시절 나는 술 취한 남자가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말리다 오히려 가해자로 입건된 적이 있다. 말리는 과정에서 그 남자의 몸에 전치 10일의 찰과상(멍)을 입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법원에서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지만 매우 씁스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 이 사건은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어려운 사건이 아닌 듯싶다. 두 사람 다 사생활이나 인성이 알려져 왔고, 또 당일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다. 그 다툼 내용을 축구협회가 바로 인정을 했고, 이강인도 개인 SNS를 통해 “형들말 잘 따랐어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공개사과했다.

종합해 보면 선배이자 팀 주장이 큰 경기를 앞두고 후배에게 자제를 촉구하다 후배가 거세게 나왔고 여기에 선배가 격앙됐으며, 이 과정에서 멱살잡이와 주먹이 나온 것이 팩트다.

그런데 왜 이강인이 ‘하늘같은’ 대선배에게 그렇게 거세게 나왔는지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마음은 때로 아무도 알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일 때가 적지 않다. 쉽게 말해 ‘내 마음 나도 몰라’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때로 가족·친지·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들을 당혹시킬만한 언동(言動)을 한 적은 없는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볼 때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후회한 적은 없는가.

정보화 시대에는 ‘베갯잇 송사’를 비롯, 온갖 일들이 다 까발려지는 시대다. 이를 지켜보는 ‘관전자’ 입장인 우리들은 결코 ‘심판자’가 아닌 데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며,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분노하고, 그 반대편을 나쁜 쪽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분노와 미움은 스스로 마음을 헝클어뜨리고 또 다른 문제로 옮겨가기 쉽다.

온갖 남의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면 우리의 정신건강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남의 일로 여기고 방관자로 살자는 얘기도 아니다. 판단하고 싶은 마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떨어져서 보자는 것이다.

요즘 서구사회에서도 유행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은 마음 속 갈망(좋은 것)과 혐오(나쁜 것) 중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중도(中道)로 나가라고 한다. 그래야 건강한 마음, 바른 지혜가 나온다고 한다.

이런 마음공부가 내게도 중요한 이유는 나 역시 매사 판단하고 참견하고 싶어 하며, 미움과 분노에 흔들리는 대표적인 사람이라서 그렇다.

당장 4월에 국회의원 선거도 있다. 이것이 또 우리 마음을 얼마나 혹사시킬 것인가. 속으로 평정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내 투표권을 행사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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