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40년 된 단골집을 찾았다.
서울의 심장이 뛰는 삼각지, 골목길의 아지트, 차돌박이 파는 ‘봉산집’.
전두환 시대 격동기 때 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차돌박이를 맛보았다.
잉크가 마르고 오후 7시면 동지들이 모였다. 소주와 담론, 비평의 만남.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동료애와 논쟁의 교향곡이 우리 주변을 휘저었다.
각각의 목소리는 삶의 밀물과 썰물, 열정과 고통이 얽혀 있다는 증거였다.
주머니는 넉넉하고 적어도 기자들끼리 의견은 자유로웠던 시절, 선배들이 계산을 치렀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 오늘은 30대 젊은 사업가와 함께 갔다. 30대와 60대가 세대를 초월해 흥겹게 마시는 술자리.
서브를 해주는 ‘진도댁’은 여전했다. 40년전 내가 처음 갔을 때부터 이미 종업원으로 일해 온 그녀는 이 집의 터줏대감이다. 나이도 70을 넘었는데 내 눈에는 아직 50대다.
‘봉산탈춤’으로 유명한 황해도 봉산에서 내려와 이곳서 식당을 연 주인 할아버지는 이미 타계했고 그 자손들이 지금 하고 있다. 워낙 이 집이 유명해지면서 강남 삼성동, 신사동 쪽에도 분점을 냈고 아들과 사위가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음식과 메뉴는 내내 그대로다. 단출한 식단. 얇게 썬 차돌박이, 잘게 썬 파와 고추를 넣어 만든 간장소스, 양배추와 고추장, 마늘이 전부다.
처음 온 30대 친구는 구운 차돌박이 한 점을 간장소스에 찍어 먹어보고는 감탄사를 내보냈다.
어. 이 친구, 맛을 아네. 소주 대신 딸애가 외국여행서 사가지고 온 이태리 와인을 땄다.
보테가, 플로렌찌아 로쏘 2015.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 와인인데 중량감 있고 맛이 괜찮았다.
요즘 예전 신문사 사람들 오시나?라고 내가 묻자 진도댁은 아니, 작년에 함께 온 이후 아무도 오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새삼 우리 모두 나이 먹었음을 실감했다. 예전 같으면 1주일에 두세번은 왔던 사람들인데.…
40년간 내가 먹는 방식도 그대로다.
차돌박이를 먹고서는 고추장으로 무친 양무침을 먹는다. 마지막으로 멸치국물로 우려낸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서 끓여 먹는 것이다.
30대 친구는 연방 감탄사를 토한다.
“나중에 여자친구와 함께 오시게”
그와는 ‘마음’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일찍이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고 한 2년은 아예 산에 들어가 보낸 적도 있는, 매우 특이한 젊은이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사업을 잘 하고 있다.
우리는 세대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겪는 마음의 얘기를 서로 나눌 정도로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와중에 수없이 찾아오는 힘든 마음, 동료들과의 갈등도 이제는 크게 다투지 않고 그럭저럭 잘 보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오늘 이처럼 기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 자고서 내일 아침 일어나면 습관처럼 삶에 대한 번민이나 안좋은 기억이 떠오를 수 있지만 그저 그런가보다 담담하게 바라보면 슬며시 사라진다고 말했다. 물론 그 친구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난 이제 힘든 마음이 찾아오는 것이 예전보다 덜 겁나. 다투지도, 외면하지도, 피하지도, 억누르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지. 물론 말은 절대 안 걸고 말이야. 아니면 그저 내가 할 일에 쿨하게 집중하던가.… 그러면 그 힘든 마음은 어느새 지나가 버려.”
“요즘엔 스트레스가 찾아오면 오히려 ‘고맙다. 네 덕에 내 마음이 더 단련이 잘 되겠다. 오늘은 네가 내게 또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줄까 기대한다’라고 속으로 혼자 얘기하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힘든 생각과 감정과는 안싸우고 흘러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마음공부의 정석이다.
# 봉산집은 내게는 ‘미슐랭’ 음식점과 다름없다. 꾀죄죄한 실내 분위기나 조리시설 등은 예전 그대로지만 내겐 미슐랭 식당보다 더 점수가 높다.
이곳만 오면 인생이 길고 풍부해진다. 수많은 추억들이 소환돼 내 마음속에서 상영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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