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 전 총리는 사실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다. 집안 내력과 아버지의 방임-학대가 겹쳐 거의 ‘인생 파탄자’가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가 우연히 미술을 접하면서 병을 다스리기 시작해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문호가 됐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요즘 정신과를 찾는 이에게 주는 항우울제(세로토닌)보다 몇십배 효과가 큰 치료 약이었던 셈이다.
미술치료(art therapy)는 정신적으로 힘든 어린이들이나 성인을 상대로 미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그들의 억압되거나 상처받은 마음을 드러내게 해서 상담이나 심리치료로 고치는 것이다.
특히 이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영국의 경우 국립보건원(NHS)과 예술위원회가 협력해 ▲우울증과 불안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자폐아 ▲ADHD와 ADD, 나아가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약 대신 예술 치료를 받게 하는 ‘사회적 처방(Social Prescribing)’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요즘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다고 어린이나 성인 구별 없이 기계적인 약물처방을 해 약물 오·남용 및 의존증 문제를 일으키는 우리 현실에서 특히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한국미술치료학회(회장 원희랑)는 영국 국립보건원에서 미술치료 총괄책임자를 역임한 닐 스프링햄 박사를 초빙해 영국의 미술치료 서비스 현황과 이를 한국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그가 치료한 환자 케이스를 보자.
극도의 성격장애와 분노조절장애로 판정된 32세의 여성이 병원을 찾아왔을 때 거의 치료 불능상태였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고, 약을 먹어도 안 낫고, 인지행동치료(CBT)도 안 됐다.
문제는 본인도 분노의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마 이런 경우 정신병동에 가두고 묶고 약을 통해 몽롱한 상태로 ‘강제 진정’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스프링햄 박사는 그녀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다가 설득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고,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응어리, 감정을 그림으로 분출해 냈다.
이처럼 미술 치료는 개인이 (속에 억압된)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1차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2차로 그 감정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3차로 자신의 사고와 행동, 즉 삶에 적용해 나가면서 극복하는 과정이며, 치료사는 여기서 좋은 ‘안내자(가이더)’ 역할을 하는 사림이다.
‘성격파탄자’, ‘사회부적응자’ 소리를 듣던 그녀는 18개월 만에 완전히 정상이 됐다. 게다가 뒤늦게 임상치료사 공부를 해 지금은 성격장애 치료 전문가로 런던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스프링햄 박사는 그녀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방임’ 받으면서 자란 것이 주요인이라면서 “부모의 학대보다 방임이 더 어린이들에게 안 좋다”고 했다.
사실 스프링햄 박사 본인도 어린 시절 난독증이 심해 ‘어리석은 놈’, ‘게으른 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런 ‘재앙(catastrophe)’적인 삶에서 탈출하게 된 계기가 미대에 진학, 미술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고난을 거울삼아 평생 미술로 사람들을 치유하겠다는 맘을 갖고 상업미술이 아니라 미술치료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말하는 영국인의 정신건강 수준은 코로나 이후 환자 수가 40%나 늘어나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미국,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어린이들의 불안과 우울이 큰 문제며, 거의 전 세대에 걸쳐 ‘외로움’이 큰 문제라고 했다.
“영국인들은 서로 ’대화‘를 잘 안 해요. 다 혼자죠. 이유라면 세계화, SNS, 지나친 개인주의, 물질주의, 심한 경쟁 등 때문이 아닐까요.”
그가 보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우울증 1위 한국은 어떤가.
”제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딸이 ’cool father(멋진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은 영국에서도 아주 매력적인 나라가 됐죠.
그런데 한국인들이 지금 힘들어한다는 것은, 과거 분단, 전쟁, 가난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긴 집단적 트라우마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 보니 숨어 있다가 이제 먹고살 만하니 트라우마가 커밍아웃‘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2차세계 대전 때 어려운 시절을 겪은 저희 영국 부모님 세대, 그리고 패전을 겪고 다시 일어선 독일인, 그중에서도 공산 치하에 살았던 동독 사람들이 겪은 트라우마들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성격과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치유법도 어느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고 했다. 예컨대 예전 히피들이 했던 ’수정(crystal)요법’이 맞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름 자신의 생존과 웰빙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유기체이기도 하죠. 이런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할 때, 주변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그때 비로소 치유와 사랑의 길이 열린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