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기능 저하를 3단계로 나눈다면, 잦은 건망증, 경도인지장애, 치매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건망증이 심하면 “나 치매 아닌가” 하고 다들 걱정했는데, 요즘은 경도인지장애라는 새로운 개념이 자리를 잡아서 이제는 건망증과 경도인지장애 구별이 중요해졌다.
‘경도’라는 말 때문에 다들 경도인지장애는 기억력이 ‘조금’ 나쁜 상태고, 치매는 ‘많이’ 나쁜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는 의학적 정의상 틀린다. 경도인지장애는 기억력이 치매만큼 나빠졌을 때 진단한다.
그렇다면 왜 ‘경도’라고 한 것일까? 아직은 손상된 인지 기능이 기억력 하나밖에 없다는 뜻에서 ‘경도’라고 한 것이다. 뇌가 담당하는 인지 기능에는 기억력 외에도 언어 기능, 시공간 기능, 주의력, 실행 능력, 계산 능력 등 여러 가지다.
학창 시절 전 과목 시험을 보던 일을 떠올리면 쉽다. 평균 점수가 60점이면 경도인지장애, 20점 이하면 치매라고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이라는 과목에서는 낙제점을 받았지만, 다른 과목 점수가 좋아서 전체 평균 점수로는 낙제가 아닌 경우가 경도인지장애다. 그래서 일상생활은 별문제 없이 유지되는 상태이다. 치매는 인지 영역을 포함한 두 과목 이상에서 낙제를 받은 상태로, 일상생활 유지가 힘들다.
그러면 건망증은 무엇일까? 이는 의학적으로 정의된 용어가 아니다. 이름 자체에 정의가 있다. 건강할 건(健), 잊을 망(忘), 증세 증(症) 즉 건강한 상태지만 깜박하는 증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노화에 따라, 수면 부족으로, 타고난 산만함 때문에, 술이나 약물 부작용 때문에 겪을 수 있다.
보통 경도인지장애가 치매의 전구기라고 하는데, 그럼 건망증은 경도인지장애의 전구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다. 이유는 그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건망증에서 나타나는 기억 장애는 ‘인출 장애’다. 알고는 있는데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경도인지장애나 치매는 정보를 입력 저장할 때부터 문제가 있어서, 떠올릴 수 있는 저장된 정보가 애초에 별로 없는 상태다.
건망증은 기억 재료가 잘 저장되어 남아 있지만 순간적으로 잘 꺼내지지 않는 상태로, 뻔히 아는 사람인데 이름이 빨리 안 떠오르고, 알듯 말듯 안 떠오르다가 힌트가 주어지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는 주로 뇌혈관이나 뇌세포의 노화 때문이다.
누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듣고 몇 발자국 걸어가서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암기’해서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잠깐 머릿속에 메모를 해두는 행위다. 이는 저장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뇌 속 메모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머릿속 메모장에 적을 수 있는 것은 7~8건 정도다. 그런데 노화가 진행되거나,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으면 이런 것을 담아둘 건수가 줄어든다. 그러니 건망증은 암기력과는 상관이 없다. 메모장은 뇌의 전두엽에서 많이 담당하고, 전두엽 세포는 정상적 노화에 의해서도 줄어들게 된다.
건망증과 경도인지장애 차이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건망증은 머릿속 메모장에 몇 가지 정보를 잠시 적어두거나, 원래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떠올리는 것, 다시 말해 인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증상이다. 반면 경도인지장애의 기억 장애는 건망증과 달리 정보 저장이 잘 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최근 경험한 일이 머릿속에 저절로 저장되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기억 장애가 경도가 아니라 치매처럼 낙제점이다. 오래전 일은 이미 뇌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경도인지장애와 치매는 기억 장애 특징이 비슷하지만, 건망증과 경도인지장애는 증상의 성격과 특징이 아주 다르다.
건망증을 간혹 경험하는 사람이 치매 걱정을 하며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즐거운 활동하거나 뇌를 쉬게 하면 건망증은 좋아진다. 하지만 경도인지장애라고 생각될 때에는 하루속히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건망증은 치매의 전조 증상이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경도인지장애의 절반이 넘는 경우는 실제로 치매의 전구 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어수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