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키다리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기부한 5004만원짜리 수표와 메모. 키다리 아저씨는 이 메모에서 약속한 익명 기부를 실현했으므로 기부를 마친다고 밝히는 한편으로 "나누면서 즐겁고 행복했다"는 글을 남겼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오늘 저녁에 시간 됩니까? 함께 저녁 식사나 합시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매년 이맘때면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전화가 드디어 걸려왔다. 22일 오후 3시였다. 매년 12월 하순이면 전화를 걸어오는 이 사람에겐 ‘대구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정체가 드러나기를 극구 피하고 매년 거액 기부금을 척척 내놓아서 생긴 별명이다.

전화를 받은 공동모금회 이희정 사무처장은 김용수 모금팀장, 김찬희 대리를 데리고 약속한 매운탕 집으로 갔다. 스웨터에 재킷을 걸친 키다리 아저씨와 아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금회 직원들이 맞은편에 앉자 키다리 아저씨는 낡은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는 5004만원짜리 수표 한 장과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일러스트=양진경

‘저는 이번으로 익명 기부는 그만둘까 합니다.’

모금회 직원들은 첫 문장에 적잖이 놀랐지만, 이어지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의 약속, 십 년이 되었군요 나누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많이 느끼고 배우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스스로에게 ’10년간 1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날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가 기부한 돈은 9년간 10회에 걸쳐 총 10억3500여만원이다.

시작은 2012년 1월이었다. 중년 사내가 공동모금회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오더니 “성금을 맡기면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됩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시 신참 직원이었던 김찬희 대리가 성금 사용 방식을 설명하자 그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봉투를 열어본 김 대리는 깜짝 놀랐다. 5000만원짜리 수표 두 장, 1억원이 들어 있었다. 김 대리는 “사무실로 불쑥 찾아와서 정체도 밝히지 않고 1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모금회 간부와 직원들이 몰려와 이름과 직업을 물었으나, 그는 한사코 “묻지 말아 달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해 12월 말 그는 모금회 근처 국밥 집에서 또 직원을 불렀다. 이번엔 1억2300만원짜리 수표 1장을 건넸다. 이후 2013년 1억2400여만원, 2014년 1억2500여만원, 2015년 1억2000여만원. 매년 1억2000만원 안팎을 기부했다.

10년 가까이 만나면서 모금회 직원들은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몇 가지 단편 정보를 알게 됐다. 그들이 추정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크지 않은 회사를 운영하는 60대 중-후반 사업가다. 경북에서 태어나 1960년대 학업을 위해 대구로 왔지만, 부친을 잃고 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에 다녔다. 결혼한 뒤 아내와 세 평이 되지 않는 단칸방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했다. 부부는 늘 근검절약했지만 수입의 3분의 1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이어왔다. 그는 “내가 얻은 소득은 주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위기를 겪었고, 그때마다 “기부하는 돈이라도 끊고 그 돈을 급한 데 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아예 처음부터 수익 일부분을 떼놓았던 게 1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했다. 공동모금회 기부를 위해서 월 1000만원씩 은행에 적금했고, 1년 만기가 되면 이자까지 합쳐 1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작년엔 그 기부금이 갑자기 2000여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모금회 직원들이 “혹시 사업이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묻자 “사업은 다행히 잘되는데 마침 꼭 1억원이 필요하다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기부했더니 (공동모금회에는) 액수가 작아졌다”고 했다. 김찬희 대리는 “올해 기부금이 5004만원인 것도 아마 다른 곳에 기부하다 보니 조금 줄어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처음엔 남편의 기부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세 번째 기부를 했을 때 ‘키다리 아저씨의 기부’ 사연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메모 사진도 함께 공개됐다. 메모 속 필체를 보고 아내는 ‘키다리 아저씨’가 남편이란 걸 알았다고 한다. 이제는 기부금을 전달할 때 남편과 함께 모금회를 찾을 정도로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키다리 아저씨는 “이제 ‘사랑의 열매’ 활동에 익명으로 기부하는 것은 중단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기부 활동을 중단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모금회 직원들은 “키다리 아저씨가 다른 곳에 기부와 나눔을 실천하시는 것 같다”며 “머지않아 다른 기관이나 단체에서 키다리 아저씨의 활약상을 들을 것 같다”고 전했다. 이희정 모금회 사무처장은 “오랜 시간 따뜻한 나눔을 실천한 키다리 아저씨에게 깊이 감사드린다”며 “보내주신 소중한 성금을 꼭 필요한 곳에 늦지 않게 잘 전달하겠다”고 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공동모금회 직원들과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나는 마중물 역할을 할 뿐”이라고 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앞으로 많은 사람이 ‘키다리 행진’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