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운수노조 전국철도노동조합, 민주노총 등 조합원들이 지난 9일 오후 서울역에서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60일째 총파업을 이어오던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조의 단식농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의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조가 11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사흘째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작년 11월 시작한 파업은 이날로 62일째 접어들었다. 이 회사는 역무·발권·콜센터 업무 등을 코레일로부터 위탁받아 수행한다. 2004년 회사 설립 이후 이런 장기 파업은 처음이다. 코레일네트웍스 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조직이다. 그런데 ‘정년 연장’ ‘기본급 인상’ 등 파업 때 으레 나오는 요구 외에 색다른 주장도 하고 있다. 노조 집행부는 ‘파업해도 임금의 70%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상 파업 기간 중 임금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지급되지 않는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노조의 주장은 전임 ‘낙하산 사장’과 체결한 합의서 때문이다. 2018년 8월 취임한 강귀섭 전 사장은 작년 7월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평균 임금의 70%를 지급한다’는 노사합의서를 체결했다. 여기엔 노조가 파업 일수, 파업 참여 노조원 등을 결정해 사측에 알린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행 노조법은 ‘사용자는 파업에 참가해 근로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선 해당 기간의 임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사의 별도 합의가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노조가 파업을 오래 끌고 가 회사 경영에 타격을 줘도 사측은 지급 의무를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지난해 7월 코레일네트웍스 사측과 노조가 서명한 합의서. ‘파업 기간에도 평균 임금의 70%를 지급한다’고 쓰여 있다. /코레일네트웍스 노조 조합원

정세균 국무총리의 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낸 강 전 사장은 수도권 한 지자체장 비서실장도 지낸 정치권 인사다. 철도 관련 업무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낙하산’이다. 낙하산 사장 한 명이 노조에 써준 황당한 합의서 한 장이 노조의 장기 파업을 가능케 한 것이다. 작년 국정감사 때 야당은 ‘전국 337개 공공기관 임원의 25%가 낙하산 인사'라고 했다. 다른 공기업에서도 낙하산 인사의 폐해가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해 코레일네트웍스 측은 “강 전 사장 혼자 합의해줬는지 몰라도 회사는 합의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강 전 사장은 본지 통화에서 “과거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몸이 아파 당시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강 전 사장은 작년 8월 법인카드 수천만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 해임됐다. 그러나 그가 써준 황당한 합의서는 이 회사 노조의 장기 파업 빌미가 되면서 회사를 궁지로 계속 몰아넣고 있다. 후임으로 들어선 하석태 전 사장도 영어학원장 출신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선거캠프 유세본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취임 한 달 만에 직원에게 막말한 것이 논란이 돼 해임됐다. 이후 사장 자리는 공석이다. 이사회가 신임 사장을 임명했지만 하 전 사장이 낸 공모절차중지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무산됐다. 내부 출신으로 직무대행을 했던 B씨는 최근 노조 장기 파업에 부담을 느껴 사표를 낸 상태다.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낙하산 인사에 따른 이런 부작용은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낙하산 인사가 이뤄지면 노조는 낙하산이라는 걸 빌미로 출근 저지 투쟁 등 거부 운동을 벌이고, 약점이 잡힌 당사자는 갈등을 풀기 위해 노조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로 몰린다. 작년 초 공공기관인 기업은행에서는 행장에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임명되자 노조가 “낙하산 인사”라면서 출근을 저지해 마찰이 일었다. 윤 행장은 임명 27일 만인 작년 1월 29일 첫 출근을 했지만, 그 대가로 노조 요구 사항을 대거 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발표된 합의문을 보면 과도한 퇴직금 논란으로 중단됐던 희망퇴직을 재개하고, 노조 추천 이사제를 적극 추진하며, 직무급제 등 임금 체계 개편 시 노조가 반대하면 이를 철회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평소 같으면 합의가 어려운 노조 요구가 대거 반영된 것이다. ‘낙하산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노조가 요구한 내용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받아줬다’는 평가가 당시 나왔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가 지난 10월 337개 공공기관·정부 산하기관 현직 임원 2727명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466명이 코드 인사⋅낙하산 인사로 의심됐다. 대선 캠프, 더불어민주당, 친여(親與) 성향 시민단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사들이다. 466명 중 기관장은 108명에 달했다. 공공기관 네 곳 가운데 한 곳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