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고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 이재용(53) 부회장이 18일 국정 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는 이날 이 부회장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최씨 딸 승마 지원비 70억원, 최씨가 만든 동계스포츠영재센터 관련 16억원 등 뇌물 86억원을 주고 이를 위해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을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이 부회장은 2017년 2월 17일 박영수 특검팀에 구속돼 2018년 2월 5일 2심 집행유예 판결로 석방되기까지 353일간 구치소에 수감됐다. 이날 판결이 확정되면 가석방 등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2022년 7월까지 감옥에 있어야 한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뇌물 요구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했고 그 과정에서 승계 작업을 돕도록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해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했다”며 실형과 법정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당초 이 부회장에게 ‘실효적 준법 감시제도 마련’을 권고하고 양형 반영 가능성을 거론했으나, 이날 “새로운 준법 감시 제도가 실효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상 양형 조건으로 참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1심은 징역 5년, 2심은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지만, 2019년 8월 대법원은 뇌물 액수를 2심보다 50억원 추가된 총 86억원으로 확정해 파기환송했다.

이 부회장은 실형을 선고받은 뒤 재판부가 진술 기회를 주자 고개를 숙인 채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함께 기소된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도 이날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과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는 각각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재판부 판단은 유감”이라며 재상고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준법감시위 주문했던 판사… “실효성 없다”며 집유 예상 뒤집어

2019년 10월 시작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 농단’ 파기환송심은 1년 3개월 만인 18일 ‘이재용 실형’으로 결론 났다. 법조계에선 예상치 못한 결과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기업 부패 예방 명목으로 제안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이 부회장이 수용했기 때문에 법원이 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법원 주변에선 선고 결과에 대해 “삼성 대응이 안이했다”는 지적과 함께 “재판부가 사건과 관련 없는 경영 훈수까지 하며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 과정

◇'총수도 무서워할 감시 기구' 주문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은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이 아니었다. 앞선 2019년 8월 대법원 판결에서 이 부회장 혐의의 유무죄는 이미 정리가 돼 있었다. 대법원은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 및 횡령 금액을 원심(징역 2년 6개월에 집유 4년 선고)보다 50억원 증가한 86억원이라고 인정했는데, 파기환송심에선 이에 대한 양형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현행법은 이 부회장 경우처럼 횡령 금액이 50억원이 넘을 경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형을 선고하게 돼 있다. 3년 이상의 형은 집행유예 선고가 안 된다. 이 부회장이 기대할 수 있는 건 판사가 자기 재량으로 형을 깎아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기환송심 재판장이었던 정준영 서울고법 형사1부장은 2019년 10월 첫 재판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있었다면 이 사건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준법감시위 설치를 ‘주문’했다. 이 부회장으로선 거기에 사활을 걸어야 할 입장이었다. 삼성은 작년 2월 준법감시위를 출범시켰다.

그러자 특검 측은 “재판부가 준법감시위 명분으로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려 한다”며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다. 우여곡절 끝에 재판은 9개월 만인 작년 10월 재개됐다. 이후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위가 실효성 있게 돌아가는지를 점검할 전문심리위원을 선정해 현장에 투입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주가 일제히 하락 - 18일 오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법정 구속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3.4% 급락하는 등 삼성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하락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한 직원이 이날 주요 종목 주가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론 떠보기 재판”

그러나 재판부는 이날 삼성 준법감시위 활동이 미흡하다고 평가하고 “새로운 준법 감시 제도가 실효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상 양형 조건으로 참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피고인 노력은 긍정적이지만, 앞으로 발생 가능한 새로운 (부패) 위험에 대한 예방 및 감시 활동을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도 댔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측면’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가 가능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지만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을 선고했다.

법조계에선 “재판부가 준법감시위를 제의한 것 자체가 잘못”이란 비판이 나왔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2019년 첫 재판에서 준법감시위에 대해 “재판 진행·결과와는 무관하다”고 했다. 한 전직 대법관은 “판사는 재판 진행·결과와 무관한 말을 법정에서 하면 안 된다. 법원 신뢰를 깎아먹는 재판 진행”이라고 했다. 또 다른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자산 400조원이 넘고, 50만 직원을 둔 삼성에 큰 영향을 주는 권고를 해 온갖 뒷말이 나오게 해놓고 여론이 심상치 않으니 덮은 것처럼 보인다”며 “여론 떠보기 재판이란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했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이날 재상고 관련 확답을 하지 않았다. 한 부장판사는 “형사소송법상 10년 미만의 선고 형은 ‘양형 부당’으로 대법원에 재상고를 할 수 없다”며 “판결의 문제점을 걸어 재상고를 한다 해도 기각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연수원 20기)는 2019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부임 후 재판 과정에서 자주 ‘치료적 사법’ 제도를 적용했다. 형벌보다 치료를 통한 재발 방지에 중점을 둔 제도다. 그는 2019년 살인 혐의로 실형을 받은 60대 남성의 항소심에서 치매 전문 병원 입원을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하기도 했다. 삼성 준법감시위도 ‘치료 사법’의 일환으로 평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