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 원전 담당 공무원들이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5월 작성한 ‘북한 원전건설 추진’ 문건에는 청와대와 여권의 주장과 달리 북한에 원전(原電) 또는 전력을 지원하는 3가지 지원 방안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31일 알려졌다.
감사원과 산업부 등에 대한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2019년 12월 1일 산업부 공무원이 삭제한 ‘북한 원전’ 관련 17개 문건 가운데 ’180514_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 방안' 문건에 대북 지원 방안이 구체적으로 담겼다고 한다.
제1안(案)은 과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경수로를 지으려던 자리에 원전을 건설하는 방안, 2안은 비무장지대(DMZ)에 원전을 건설하는 방안, 3안은 신한울 3·4호기를 완공해 북한에 송전(送電)하는 방안이었다고 한다. 감사원은 2020년 산업부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면서 해당 문건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미·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KEDO는 2001~2006년 북한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에 경수로 2기를 건설하다 중단한 적이 있다. 3세대 신형 경수로가 설치되는 신한울 3·4호기엔 7900억원이 투입됐으나,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신규 원전 건설이 백지화되면서 건설이 중단됐다.
산업부가 북한 원전 관련 문건들을 만든 시기는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4월 27일)과 2차 남북정상회담(5월 26일) 사이다. 당시는 산업부가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 결과도 나오기도 전에 ‘가동 중단’ 방침을 정하고 밀어붙이던 때이다. 산업부 안팎에서는 “전략물자(원전) 이전 문제를 산업부 국장급 이하 공무원 3명이 검토했다는 것은 난센스”라며 “청와대 지시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나 산업부는 31일 “아이디어 차원에서 만들어진 해당 보고서 안에 ‘내부 검토 자료이고,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돼 있다”며 “박근혜 정부 때부터 검토하거나 만들어진 자료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과 교류 협력사업 어디에서도 북한의 원전 건설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반면,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31일 “남쪽엔 원전 파괴, 북쪽에 원전 건설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분명한 답변을 요구한다”고 했다.
靑 “北에 USB 줬지만 원전의 ㅇ자도 없었다” 野 “원전게이트, 누구 지시로 극비 추진했나”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과 야권은 31일에도 정부의 북한 원전 건설 검토 계획을 놓고 충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9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적 행위”라고 한 데 대해 격노하며 “아무리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 공세는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강력 대응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은 산업부 공무원이 삭제한 파일 530개 중에 북한 원전 검토 파일이 포함돼 있는 것에 대해 “해당 공무원 개인의 아이디어일 뿐, 청와대나 책임 있는 관료 등이 논의한 게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또한 문 대통령이 2018년 4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 때 발전소 내용이 담긴 USB를 건넨 것은 맞지만 그 안에 원전 관련 내용은 없다고도 하고 있다.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교류 협력 사업 어디서도 북한의 원전 건설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USB에 담긴 문서 내용을 주말 새 다시 열람했지만 원전의 ‘ㅇ’ 자도 없다”며 “해당 문서를 공개할지에 대해서도 검토했지만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과 같은 국가 기밀 문서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USB 자료에는 신재생 관련 발전소 건설 및 북한의 화력 발전소 개선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은 북한 원전 건설이 박근혜 정부 때부터 추진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논평에서 “북한 원전 구상은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이 처음 언급했고,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라는 한마디에 정부 공공 기관들이 앞다퉈 아이디어로 내놨다”며 “색깔론과 북풍 공작 정치를 국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 수석을 지낸 윤영찬 민주당 의원은 “원전 1기 건설 비용이 5조라는데 야당의 동의 없이 5조를 어떻게 마련해 몰래 건네줄 수 있나요”라고도 했다.
야권은 현 정부의 북한 원전 건설 검토를 ‘원전 게이트’로 규정하고 “대통령이 답하라”고 한목소리로 촉구했다. 국민의힘은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실시를 요구하는 한편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31일 국회에서 ‘대북 원전 의혹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라는 제1 야당 요구에 청와대는 비정상적, 비상식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서 “경천동지할 만한 중대 사안이다. 북한 원전 건설이 누구 지시에 따라 추진된 건지, 극비리에 추진한 사유가 무엇인지 밝히라”고 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나경원 전 의원은 “우리나라에선 탈원전, 북한 앞에선 ‘원전 상납’ 아니었는지 국민이 묻고 있다”고 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문 대통령은 무엇을 숨기나,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북에 원전을 적법 절차 없이 지어주려 했다면 그것은 이적 행위”라고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해당 보고서는 에너지 분야 협력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내부 자료”라며 정부 공식 자료는 아니라고 했다. 산업부 신희동 대변인은 그러나 해당 문건이 박근혜 정부부터 나온 것이라는 여당 주장에는 “박근혜 정부부터 검토하거나 만들어진 자료는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