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55) 프로배구 남자부 KB손해보험 감독이 20일 과거 박철우(36·한국전력)를 때린 사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사죄한다”며 올 시즌 남은 경기에 출장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2009년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박철우를 구타해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으로 배구계에 돌아왔고, 경기대 감독을 거쳐 올 시즌을 앞두고 KB손해보험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상열 말에 피가 거꾸로 솟은 박철우
이 사건이 최근 다시 불거진 것은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이재영·다영(25) 쌍둥이 자매의 학창 시절 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폭투(폭력+미투)’ 때문이다. 다른 배구 선수들에 대한 학교 폭력 피해 폭로가 이어지면서 사회 전체에 큰 논란이 됐다. 이 감독은 지난 17일 우리카드전에 앞서 취재진을 만나 과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어떤 일이든 인과응보가 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선수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12년 전 사건으로 아직 이 감독으로부터 제대로 사과받은 적이 없는 박철우는 이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하루 종일 손이 떨렸다”고 말할 만큼 분노를 느꼈다. 지난 18일 오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는 글을 남긴 그는 그날 저녁 OK금융그룹과의 경기를 마친 후 인터뷰를 자청했다. 박철우는 “(이 감독에게) 직접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며 “(이 감독이) 지나가면서 악수를 청할 때 너무 힘들었다. 감독으로 선임한 구단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철우는 2009년 폭행 사건 이후 이 감독이 바뀌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 감독은 대학 지도자 시절 선수들에게 ‘박철우만 아니었으면 맞았어’란 말을 했단 얘기를 들었다”며 “(이 감독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경기에 지고 있으면 얼굴이 붉게 변한 선수들이 많았다. 몇몇은 기절하고 고막이 나갔다. 내 친구와 동기들이 겪었다”고 했다. ‘인과응보’를 운운하며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는 이 감독의 말이 한마디로 ‘헛소리’였다는 게 박철우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사과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프로배구가 이런 문제로 나쁘게 보이는 게 싫지만 이때 잘못된 것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섰다”고 말했다. 2009년 박철우 폭행 사건 당시 박철우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해 12년 전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12년 전에도 인터뷰 자청한 박철우
2021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 2009년엔 전 세계적으로 신종 플루가 유행했다. 배구계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12년 전 폭력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국가대표팀 라이트 공격수였던 현대캐피탈 소속 스물네살 박철우는 9월 18일 저녁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삼원가든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박철우의 얼굴 왼쪽은 검붉게 긁혀 있었다. 복부에도 붉게 멍든 상처가 보였다. 병원에서 받아 온 ‘전치 3주’ 진단서도 공개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철우의 가족들은 울먹였다.
박철우는 “전날 오후 6시 태릉선수촌에서 대표팀 훈련이 끝난 후 모든 선수가 보는 앞에서 이상열 코치에게 맞았다”며 “손바닥과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로 배를 찼다. 뇌진탕 증세에 귀가 울리는 이명 증상도 있어 당분간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9월 말에 열리는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 준비를 위해 대표팀이 소집됐는데, 대표팀 코치가 주전 선수를 구타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히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야만의 시대…”모욕감을 느꼈다”
당시 박철우 인터뷰 기사를 보면 대표팀 지도자들에 의한 폭행이 만연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에도 구타가 자주 있었느냐는 질문에 “과거보다 앞으로 일이 중요하다. 지도자들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넘어가려다가 나처럼 이름이 알려진 선수도 이렇게 맞는 것을 겪고 후배를 위해서라도 이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박철우는 이상열 코치에게 왜 맞는지 몰랐다. 훈련도 성실하게 했고 이 코치에게 대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박철우가 이상열 코치에게 맞으면서 들은 얘기는 이랬다. 대표팀 사령탑을 맡고 있던 김호철 감독이 말할 때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박철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눈빛’ 때문에 때린다니, 박철우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선수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수차례 맞다 보니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맞으면서 운동을 했지만 이건 ‘매’가 아니라 ‘폭행’이었다”고 했다.
◇소속팀 선수가 맞아도 방관한 김호철
당시 김호철 대표팀 감독은 박철우의 소속팀 현대캐피탈 감독이었다. 박철우가 맞는 자리에 김 감독은 없었다.
박철우는 그날 밤 김 감독을 찾아가 구타 사실을 얘기했지만 김 감독은 박철우를 달래기만 했다. 김 감독의 반응에 실망한 박철우는 선수촌을 떠나 기자회견을 열었다. 다음 시즌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박철우는 2010년 6월 삼성화재로 옮겼다.
박철우는 폭행 사건이 1년쯤 지나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김호철 감독과의 불화설을 부인했다. 박철우는 “‘김 감독님이 코치를 시켜 선수에게 손을 댔다'는 말이 있는데 다 추측이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김 감독님과 운동하는 동안엔 (불화가) 없었다. 경기할 땐 경기만 생각했다. 감독님도 내게 아쉬운 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구타당한 후 감독님을 찾아 말했는데도 방치해 힘들었다. 기자회견을 한 게 성급한 판단이었을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김 감독에 대한 아쉬움도 얘기했다.
김 감독은 이상렬 코치의 박철우 폭행 사건으로 대표팀 감독에서 해임됐다. 젊은 선수가 선수촌을 나와 언론에 기자회견을 자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당시 배구협회의 역할도 컸다.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박철우의 아버지는 “배구협회에 기자회견을 열어 줄 것을 상의했지만 협회에선 ‘언론에 알릴 일이 아니다’며 자체 해결을 원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