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 대기업 계열사 A사의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회사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다. 최근 IT업계가 경쟁적으로 직원들의 연봉을 인상하며 구인 경쟁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자, 회사 측이 IT 업계로의 이직을 막겠다고 태스크포스를 꾸렸다는 것이다. 해당 글의 작성자는 “회사가 저년차 직원들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하고 있고, 회사에 알리지 않고 이직하면 소송을 제기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했다. 해당 글에는 분개한 직원들의 회사 비난 댓글이 여러 개 달렸지만, 알고 보니 그룹 내 다른 계열사에서 도는 소문을 퍼나른 것이었다. 이 회사 직원 이모(27)씨는 “연봉협상 시즌인 2월에 IT 이직 열풍까지 맞물리니, 이렇게 확인되지 않는 정보를 짜깁기해 올린 글이 많다”고 했다.
기업들이 ‘블라인드 리스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블라인드는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로, 메일을 통해 자신이 특정 회사의 사원임을 인증해야 이용할 수 있다. 회사 생활의 고충이나 상사에게 말하기 어려운 속마음을 자유롭게 털어놓을 수 있어 직장인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지난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등 기업 경영진의 갑질이나 부조리 의혹을 고발하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용자가 늘면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구성원들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쓴 글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손상이 간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 1월 KBS 소속 한 이용자는 KBS를 비판하는 회원들에게 “아무리 뭐라 해도 우리 회사 정년 보장되고, 직원 절반은 매년 1억원 이상 받고 있다”며 “밖에서 욕하지 말고 능력과 기회가 되면 그냥 KBS에 들어와라”라고 조롱 섞인 글을 올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KBS는 이튿날 “대단히 유감스럽고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최근 3기 신도시 지역에 대한 직원들의 투기가 불거진 LH에서도 한 직원이 블라인드에 “아니꼬우면 (LH로) 이직해라”라는 글을 올려 들끓는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기업 내부적으로도 블라인드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 내부 구성원들이 일방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A사처럼 사실 관계에 대한 정확한 확인 없이 들은 말을 퍼나르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를 근거 없이 ‘공개 저격’하는 일도 적지 않다. 지난 1월 한 증권사 블라인드에선 “팀장이 매월 생일인 직원에게 부서 점심 회식 계산을 강요한다”며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한다”는 글이 두 차례 잇따라 올라왔다. 각각의 글에 댓글 30여개씩이 달려 반응이 뜨거웠다. 하지만 글이 작성된 시기엔 코로나 확진자가 크게 늘어 5인 이상 집합금지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인사팀과 홍보팀 측에서는 해당 글이 허위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 역시 본지 기자 질의에 “해당 글과 관련해 실제로 노조에 신고가 접수된 사례는 없다”고 했다.
이처럼 블라인드 리스크가 점점 커지자 기업들은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블라인드를 모니터링하는 건 주요 기업 인사팀 직원들의 정식 업무가 된 지 오래다. 한 IT 기업 인사팀 직원 김모(27)씨는 “인사팀 직원 모두가 블라인드에 가입해서, 사내 블라인드 게시판에 알림 설정을 해두고 알림이 뜨는대로 게시글을 확인한다”며 “주의가 필요한 글이 올라오면 팀에 공유한다”고 했다. 주된 모니터링 대상은 연봉·복리후생·인사제도·회사 평판 등에 대한 불만이다. 김씨는 “블라인드 모니터링은 입사했을 때부터 인사팀의 주요 업무였다”고 했다.
이와 함께 기업들은 소원수리 제도를 보완하고, CEO들이 앞다퉈 ‘타운홀 미팅’에 나서는 등 직원들이 불만을 자유롭게 털어놓도록 유도하고 있다. 회사의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블라인드에 자극적인 폭로가 올라오느니, 직원들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회사가 답변하는 것이 훨씬 위험 부담이 낮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부터 사내 익명 게시판에 ‘오감톡’이라는 코너를 신설했다. 임직원이 경영진의 공식 답변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올려 1개월 이내에 5000명 이상으로부터 ‘공감’ 클릭을 얻으면, 회사 또는 담당 임원 명의로 그 글에 직접 답변하는 구조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블라인드에 올라오는 글은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을 선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내 게시판에 불만을 털어놓게 만들면 아무래도 다른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해 턱도 없는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른 직원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음모론이나 인신공격 등을 함부로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의 인기는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전망이다. 한 물류 회사 직원 A씨는 “회사에는 소원수리함도 있고 사내문화 개선 담당 임원도 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며 “아무리 불만을 제기해도 ‘밋업(meet-up·CEO와 임직원의 소통 시간)’에선 인사팀이 민감한 내용을 다 걸러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밋업 때 참석한 직원들 면면을 보니, 신입과 사회자를 빼면 현업은 전멸이더라”며 “이런 식이니 직원들이 블라인드를 애용하게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