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시 마포구 망원역 근처의 7층짜리 상가 건물. 이 건물 꼭대기층에는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이 있다. 보통 남녀 화장실 입구에 각각 붙은 ‘바지 입은 남자’ ‘치마 입은 여자’를 반반씩 합쳐놓은 그림이 화장실 문에 붙어있었다. 7층에는 여성 화장실과 남성용 대신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만 있다. 2평 남짓한 크기의 화장실에 들어서자 남성이 쓸 수 있는 소변기 2대와 좌변기, 장애인·노약자용 손잡이, 세면대 등이 설치돼 있었다. 이 층에 입주한 병원 관계자는 “입주한 업소 손님 중 여성이 많다”며 “남녀 손님들 모두 불편하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잘 이용한다”고 했다.
성(性) 구분이 가장 엄격한 공간, 화장실의 성별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 성공회대 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5일 “올 여름방학 중 교내에 성 중립 화장실을 설치하기로 의결했고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고, 서울 강동구 한림대 성심병원도 지난달 ‘성 중립 화장실’을 설치해 이달 중 운영 예정이다. 화장실 입구에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 식으로 구분돼 있던 표지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서울 금천구의 평생학습종합센터 ‘모두의 학교’는 작년 12월 화장실 표지를 남녀 공히 머리와 팔, 다리만 그린 모양으로 바꿔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완고했던 화장실의 변화는 달라지는 사회상을 반영한다. 가장 큰 동기는 남녀 성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고정관념이 점차 사라지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 의식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국가인권위원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 591명 중 39%는 ‘(성별과 다른) 화장실에 가는 걸 피하기 위해 음료나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36%는 ‘화장실 이용을 포기했다’고 했다. 여기에 ‘휠체어 탄 아버지를 모시려는 딸’ ‘유치원생 딸과 함께 외출한 아빠’ 등 고령화,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른 육아 평등 시대에 화장실의 유연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배경이다. 같은 숫자의 남녀 좌변기를 설치하면 늘 여성 칸의 줄만 길게 만들어지는 현실적 문제도 작용한다. 쇼핑몰, 백화점, 고속도로 휴게소 등 곳곳에 ‘가족 화장실’이란 ‘중간 지대’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31일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전국 199개 휴게소 가운데 182곳에 ‘가족 화장실’이 설치돼 있다.
한국에선 이제 시작 단계지만, 미국이나 북유럽 등 해외에선 ‘성 중립 화장실’이 보편적이다. 미국에선 지난 2015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 최초의 성 중립 화장실이 생겼고, 주 정부와 대학 등으로 확산 중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은 공공 화장실 상당수가 성별 구분이 없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화장실의 성별 구분을 없앨 경우, 남녀가 칸막이 하나를 두고 용변을 봐야 하는 상황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법 촬영이나 성추행 등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기존의 장애인 화장실을 가족 화장실이나 성 중립 화장실로 개조하는 경우 오히려 장애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장영호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교수는 “성 중립 화장실이나 가족 화장실의 등장은 성 소수자, 장애인, 영유아 같은 약자들도 다른 사회 구성원과 똑같은 수준으로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공공의 책임이 구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최창식 한양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앞으로 새로운 건축물을 지을 때 소수자를 배려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건축을 적극적으로 설계에 반영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