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이런 영상이 돌아다니는데요….”
20대 직장인 여성 A씨는 지난달 한 거래처 직원에게서 인터넷에 본인의 성관계 영상이 돌아다닌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해당 영상에는 본인 얼굴이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름, 직업까지 명시돼 있었다. 이를 촬영해 뿌린 사람은 2년 전 사귀었던 한 남성이었다. 해당 남성은 A씨를 비롯해 여성 100여명과 성관계를 한 몰래카메라를 찍어서 유포했고, 경찰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포털 사이트 구글에 A씨 이름과 직업을 치면 해당 영상이 담긴 사이트가 주르륵 검색됐다. A씨는 어쩔 줄 몰라 즉시 경찰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신고했고, 우후죽순처럼 퍼지는 영상을 막으려 각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직접 ‘삭제 요청’을 했다. 2~3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본인 영상을 찾느라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뒀다.
국제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지난 16일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라는 보고서를 내고 한국을 콕 집어 ‘디지털 성범죄 국가’로 지목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12명의 인터뷰가 담겼고, 이들은 “불법 영상물의 신속한 삭제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한국이 디지털 성범죄가 매년 급증하고, 불법 성범죄 영상이 나돌아도 구제가 어려운 국가로 낙인찍혀 가고 있다. 지난해 방심위에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피해 건수는 전년보다 15% 증가한 4만1571건. 몰래 찍은 성관계 영상, 타인의 몸을 합성한 나체 영상, 영상통화로 찍은 유사 성행위 영상 등 불법 영상도 국내외 사이트에서 검색 몇 번이면 손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삭제 요청을 처리해야 할 방심위는 여야(與野) 정쟁에 휘말려 5개월째 ‘5기 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한 채 공전(空轉)하고 있다. 방심위는 자체 심의를 거쳐 국내 사이트의 불법 영상물을 강제 삭제하고, 해외 사이트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하지만 위원회 구성이 안 돼 지난 1월 30일부터 모든 심의가 완전히 멈춘 상태다. 여야가 수개월째 다투는 사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영상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고 있다.
22일 방심위에 따르면, 1월 30일부터 6월 21일까지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피해 건수는 총 1만5886건이다. 이 가운데 방심위 실무자가 자율 삭제 요청을 해 처리된 건수는 5640건뿐이다. 나머지 1만246건(전체의 64%)은 사이트가 자율 조치를 거부해, 방심위 심의만을 기다리며 여전히 책상에 수개월째 쌓여있다. 방심위 심의를 거쳐야만 강제 삭제, 접속 차단과 같은 강제 조치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방심위 최승호 팀장은 “성범죄 영상 같은 특정 정보를 불법으로 명시하고 규제하는 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 제한에 해당되기 때문에, 법적 권한을 가진 위원들의 심의가 있기 전까지는 실무자가 삭제·차단을 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5개월째 방심위원 구성이 지연되는 것은 ‘추천 위원’을 둘러싼 여야 간 다툼 때문이다. 위원은 총 9명으로 구성되는데 대통령, 국회의장,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가 각 3명을 추천한다. 통상적으로 정부·여당 몫 6명, 야당 몫 3명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위원장 몫에 친여 성향 인사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여야 간 명단 공개 요구와 위원 추천 거부 등 공방이 오가며 5개월째 파행 중이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경찰과 방심위, 피해지원센터 등 성범죄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 권한이 여러 기관에 나눠져 있고 단계도 복잡한 것이 문제”라며 “성범죄 피해 구제를 전담해서 신속하게 처리하는 부서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