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노숙인 희망일자리 사업'의 김영산 반장이 역 앞에서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김보담 인턴기자

지난 4일 낮 12시 20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광장. 낮 최고기온 33도의 무더위 속에서 노란 조끼를 입은 남성 4명이 파란색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든 채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들을 뒤따라가던 김영산(58) 반장은 “더우니까 한 번만 돌고 그늘에서 쉬자”라고 했다.

비슷한 시각, 역 출구 앞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노숙인 무리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한 노숙인이 욕설과 함께 “너 다시 말해봐”라고 고함치자, 맞은 편에 있던 노숙인이 상대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목격한 김 반장은 곧장 달려와 이들을 중재했다. “형님, 협조 좀 해줘. 우리가 남이야? 저기 가서 마시자.” 김 반장의 얼굴을 본 둘은 술에 취해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부축을 받고 광장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날 순찰 도중 이마에 5cm 남짓 상처가 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노숙인을 발견한 김 반장은 “병원 데려가 줬더니 밴드는 왜 뗐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김영산씨는 서울 동대문구와 한국철도공사가 함께 진행하는 청량리역 ‘노숙인 희망일자리 사업’의 반장이다. 주중에는 늘 이곳에서 사업단원 관리, 노숙인 단속, 환경 미화 등 업무를 한다. 김 반장은 희망일자리 사업 1기 출신이다. 그가 사업에 참여한 2018년까지만 해도 일대에 40여명의 노숙인들이 밤낮으로 술판을 벌였고, 일주일에 2~3번 꼴로 관련 민원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노숙인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김 반장을 섭외한 뒤로 청량리역에 밀집해 있던 동대문구의 노숙인들은 4년만에 50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동대문구청 사회복지과 이종현 주무관은 “노숙인들은 너무 많아 통제가 안 되는데 정작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적었던 상황”이라며 “김 반장이 임명된 뒤로 노숙인들의 협조를 구하기가 쉬워졌다”고 말했다.

지난 4일 낮 12시 40분쯤, 김영산 반장이 역 입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노숙인들에게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해 이동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김보담 인턴기자

김영산 반장 역시 노숙인 ‘출신’이다. 20세 때 조현병이 발병해 장애 3급을 판정받은 그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척추 두 마디가 부러지기도 했다.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3개월 뒤 사직서를 냈다. 김씨는 “약 때문인지 장시간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며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을 포기하자 가정불화가 생겼고 이 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고 했다. 서른 초반의 나이에 김씨는 숙식을 제공해주는 신문 보급소, 지자체 공공근로사업인 노점 단속반 등에서 일을 했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더 이상 의욕을 찾지 못했던 그는 청량리역을 찾았다. 노숙인들과 어울리며 집에 안 들어가는 날들이 많아졌고, 사실상 노숙인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김씨는 “매일 소주 6~7병을 들고 청량리역을 찾아 밤새 노숙인들과 술 마셨다”며 “어느새 이들과 ‘식구’가 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0여년 동안 노숙 생활을 이어오던 김씨는 “그 와중에도 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함께 어울리는 노숙인들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런 김 반장과 노숙인들에게 2018년 시작된 ‘희망일자리 사업’이 기회가 됐다. 처음에 김 반장을 포함한 대부분은 “뭐 하러 저런 걸 하냐”는 반응이었지만 구청 직원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김 반장은 “막상 해보니 아픈 식구들을 챙겨주고, 주변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며 “우리 식구는 우리가 챙긴다는 마음으로 만족하면서 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노숙인의 상당수는 김 반장 혹은 그와 가까운 단원들로부터 소개를 받은 이들이다. 5년 전부터 김씨와 어울렸다는 심성종(47)씨는 “김 반장님은 원래부터 식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픈 사람을 챙겨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나를 포함한 몇 명에게는 생명의 은인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8년차 노숙인 김현동(54)씨는 “‘이렇게 살지 말자’는 김 반장과 구청 직원들의 권유가 매일 길거리에서 깡소주를 들이키던 삶에서 날 구해줬다”며 “지금은 한 달에 20만원씩 저축해 돈이 모이면 고향에 홀로 계신 85세의 노모에게 찾아가겠다는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