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제 오류 논란을 빚은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제의 정답 결정이 유예됐다. 이 과목에 응시한 수험생 6515명이 10일 받는 수능 성적표에는 생명과학II 성적이 공란으로 처리된다. 1994학년도 첫 수능 시행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수시 모집에서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제시한 대학들은 이번에 유예된 생명과학II 정답 결정이 지연될 경우 합격자 발표 등 대입 일정이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본안 소송이 늦어지면 오는 30일부터 원서 접수를 시작하는 정시 모집 일정까지 줄줄이 영향을 받아 큰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9일 수험생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낸 2022학년도 수능 정답결정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생명과학II 20번의 정답을 5번으로 결정한 처분을 본안(本案) 소송의 판결 선고 시까지 효력을 정지한다”고 결정했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이번 수능에 응시한 44만8138명의 성적표를 예정대로 10일에 통지하되, 생명과학II 응시생 6515명의 해당 과목 성적은 추후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II 응시생들은 해당 과목 성적은 공란으로 표시되고, 다른 과목은 등급·백분위·표준점수가 적힌 성적표를 받게 된다. 이날 오전 수능 채점 결과 발표 때 집행정지 인용 가능성에 대한 대책 언급을 피했던 교육부와 평가원은 저녁까지 혼선을 빚다가 뒤늦게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각 대학들과 협의해 향후 대입 일정 등을 안내하겠다”며 “정답 결정 취소소송이 신속하게 진행돼 대입 일정에 차질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본안 소송은 같은 재판부에 배당됐으며 10일이 첫 변론 기일이다.

이번에 출제 오류 논란이 불거진 생명과학II 20번 문제는 어떤 동물의 유전적 특성을 지문으로 제시한 뒤 이에 대해 ‘맞는 설명’을 고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문에 나온 공식대로 풀면 해당 동물의 개체 수가 ‘음수(-)’ 값이 나온다. 이 때문에 수능 직후부터 수험생들과 학원가에서 출제 오류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동물을 ‘-1마리’라는 식으로 세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가원은 지난달 29일 정답 확정 발표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 과정의 성취 기준을 준거로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판단했다”며 이상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생명과학II는 의대를 비롯해 이과 상위권 학생들이 응시하는 과목이어서 전원 정답 처리 등의 판결이 나오면 표준점수 최고점이 1~2점 하락하는 등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생명과학II 응시생은 서울대를 비롯해 최상위권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의 점수 변동에 따라 다른 대학까지 줄줄이 여파가 이어진다”며 “포항 지진으로 연기된 2018학년도 수능 못지않은 파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올해 수시 모집 합격자 발표는 오는 16일까지 진행되고 17~20일에 합격자 등록이 이어진다. 수능 최저 학력 기준과 무관한 일부 전형은 오는 10일부터 합격자를 발표하지만, 수능 최저 기준과 관련 있는 전형의 합격자 발표는 영향을 받게 된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주요 대학 관계자들은 “다음 주 수시 합격자 발표 일정은 본안 소송, 교육부와의 협의 등을 고려해 조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2014학년도 수능에서 세계지리 8번 문항이 소송 끝에 ‘정답 없는 오류 문항’ 판결이 나왔던 적이 있다. 1심에서는 수험생들이 패소했지만, 2심에서 “잘못된 문항”이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대학들이 입학 전형을 재실시, 전국 4년제 대학과 전문대에서 629명이 추가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