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3~25일 크리스마스 한정판 피크 케이크를 구입하기 위해 서울 도산공원 근처 누데이크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왼쪽). 오른쪽은 '찢어먹는 케이크'로 유명한 누데이크의 대표 상품이다. /조선일보DB·누데이크

토요일인 22일 오전 11시30분 서울 도산공원 앞. 4층짜리 콘트리트 건물 앞에 젊은 남녀가 삼삼오오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 골목에는 똑같은 케이크 상자를 든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찢어먹는 케이크’로 소문난 디저트 ‘누데이크’ 케이크였다. 케이크를 빵칼로 예쁘게 잘라 포크로 떠먹지 않고, 손으로 찢어 먹는다니?

누데이크의 '피크 케이크'를 찢는 장면.

이 ‘찢-케이크’는 독특하다. 산봉우리 같은 검은색 크로와상을 손으로 과감히 찢으면, 연두빛 녹차 크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정식 이름은 ‘피크(peak·봉우리) 케이크’, 별명은 ‘용암(lava) 케이크’다. 판매가는 3만9000원.

볼수록 난해하다. 양초는 크림에 꽂아야하나, 봉우리에 꽂아야하나. 흘러내리는 녹차 크림은 부먹(부어 먹기)인가, 찍먹(찍어 먹기)인가. 찢고, 뜯고, 찍고, 맛보는 이상한 케이크, 이걸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소매점포 대재앙 시대, 찢-케이크 등장

새벽부터 줄선다는 베이글, 도넛, 맘모스빵, 발효종빵, 감자빵…. 맛있는 빵집이 차고 넘치는 요즘, 누데이크는 지난해 2월 개장과 동시에 MZ세대의 ‘빵지순례’ 코스에 합류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누데이크’를 검색하면 인증 게시물 2만1000건이 뜬다. 요즘 주말 하루 평균 방문객은 2100여명. 유명 제품은 이른 오후면 품절된다.

지난해 12월 23~25일 크리스마스 한정판 피크 케이크를 구입하기 위해 서울 도산공원 근처 누데이크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

이 빵집의 ‘출신 성분’은 좀 생뚱맞다. 2011년 창업한 국내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본가다. 젠틀몬스터는 서울 도산공원에 지하1층~4층 규모(대지 면적 646㎡) 플래그십 스토어 ‘하우스 도산’을 열면서 지하에 빵집을 열었다.

모두가 ‘오프라인 소매업의 종말’(Retail Apocalypse)을 얘기하고, 유통 대기업마저 폐점 행렬에 동참하는 ‘위드 코로나’ 시기에 거꾸로 초대형 오프라인 매장을 연 것이다. 젠틀몬스터는 이 매장을 통해 “소매업의 미래(Future Retail)를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세운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빵’이었다.

젠틀몬스터가 지난해 2월 개장한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 조감도. 지하 1층은 빵집이고 1층은 전시공간, 2~3층은 선글라스 매장, 4층은 화장품·향수 매장이다.

◇빵과 선글라스의 연결고리는?

선글라스와 빵은 나름 공통점이 있다. 현재 기술력으로는 구매 과정에 ‘오프라인 경험’이 꼭 필요하다. 안경테와 선글라스는 쇼핑하기 전에 제품을 직접 만지고 써보는 비율이 높다. 스마트폰 가상 착용 앱이나 실물 크기 종이 안경테를 제공하는 업체도 있지만, 한계가 있다. 얼굴에 안경테가 어울릴지, 코받침은 무겁지 않은지, 옆머리가 조이지는 않는지…. 일단은 써보고 결정해야 실패 확률이 낮아진다.

저 선글라스를 쓴다고 해서 화보 속 모델 같아 보이진 않는다는 걸 대부분의 소비자가 잘 알고 있다. 선글라스나 안경테는 현재로선 구매 결정을 하기 전에 오프라인 매장에서 써봐야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 /젠틀몬스터 화보

빵도 마찬가지. ‘온라인 판매를 하지않는’ 어떤 빵집이 있다고 치자. 메뉴를 맛보려면, 파는 곳에 가야한다. VR 기기를 착용하고 가상으로 맛과 향을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이점은 가격이다. 빵 값이 수십만원짜리 선글라스보다 훨씬 싸다.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매장 문턱을 낮추는 ‘집객(集客) 품목’으로 디저트 가게, 레스토랑, 커피숍을 차리는 이유다.

역쇼루밍: 상품 정보를 온라인에서 얻은 뒤, 오프라인에서 구매.
쇼루밍: 오프라인에서 상품을 체험한 뒤, 온라인으로 구매.
젠틀몬스터와 누데이크는 지난해 6월 경기 하남스타필드에도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점포를 확장했다. 그곳에선 12개의 로봇이 손님을 맞이한다. /오종찬 기자

◇빵집 페르소나와 세계관

선글라스 회사가 빵집 프로젝트에 시동을 건 시점은 2018년이었다.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했다.

공간·패션·그래픽 디자이너가 먼저 모였고, 파티쉐가 나중에 합류했다. 고객 페르소나(persona·인격)도 설정했다. ‘디저트·빵 덕후이면서, 미술 회화에 관심이 많고, 세련된 패션 감각을 가진 괴짜. 브랜드 신상품을 즐겨 입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데에도 적극적인 사람.’

네이버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의 누데이크 매장을 방문한 아바타.

매장 곳곳에는 ‘퓨처 리테일’이라는 세계관(콘텐츠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시공간)을 반영하듯, 근미래(近未來·가까운 미래)적 요소들을 배치했다. ‘미래로 나아간다’는 뜻과 퀀텀 비트 개념을 암시하는 건물 간판의 숫자(Haus 0 10 10 10 1), ‘새롭고 색다른 케이크’(New Different Cake)를 의미하는 빵집 이름, 1층에 우두커니 놓여있는 폐건물 잔해, 윗층 매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체 모를 ‘로봇’들…. 대형 디스플레이 패널로는 디저트 먹는 행위를 표현한 미디어 아트 영상을 반복적으로 틀어 예술 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대체 빵집에 페르소나와 세계관까지 동원하는 이유는 뭘까. K팝·마블 시리즈에 스며드는 것처럼, 소비자도 매장에서 ‘세계관 떡밥’을 찾고, 콘텐츠 간 관계성을 즐기면서 충성 고객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신세계푸드 빵집 ‘유니버스 바이 제이릴라’ 역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닮은 고릴라 캐릭터 ‘제이릴라’가 화성에서 도착했다”는 세계관을 채택해 화제를 모았다.

◇선 넘은 오이 케이크, “모두가 좋아할 필요는 없다”

오징어 먹물로 색을 낸 크로와상 봉우리와 용암 녹차 크림이 담긴 ‘피크 케이크’는 이런 배경과 어우러지며 금세 유명해졌다. 놀라운 비주얼, 소비자의 적극적 참여(‘찢다’)를 요구하는 디저트에 사람들이 즉시 관심을 보였다. 선을 넘고 상식을 깬 메뉴도 잇따라 출시했다. 오이 케이크 ‘오이크’(1만2000원)와 올리브가 든 ‘포그(fog·안개) 케이크’(5만7000원)가 대표적이다. 호불호가 갈리는 재료로 만든 디저트는 ‘100명을 적당히 만족시키는 것보단 10명이 열광할 맛을 찾자’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런 누데이크 빵과 디저트에 대해 소셜미디어에서는 “아주 뛰어난 맛은 아니다” “감각적이고 재미있다”는 평이 오간다.

누데이크의 오이 케이크. 오이는 국내에선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싫모)’ 팔로워만 9만4000여명에 달하는 채소다.

‘비주류 감성’과 ‘서브컬처(하위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빵도 있다. 손톱만한 크로와상 4개를 작은 봉투에 담아 파는 ‘마이크로와상’이나, 구겨놓은 캔·코르크 마개를 닮은 빵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누데이크 이재연 브랜딩 팀장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오이크를 맛보고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며 “우리의 독특한 시도로 누군가 새롭고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23~25일 크리스마스 한정판 피크 케이크를 구입하려는 인파로 붐비는 서울 신사동 누데이크 매장.

이쯤 되면 선글라스 회사의 빵집 모델, 찢어먹는 케이크가 언제까지 사람들을 흥분시킬지도 궁금해진다. 패션·라이프 분야 전문인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는 “젠틀몬스터는 선글라스 브랜드이지만, 근본적으로 ‘공간 디자인 스타트업’ 성격이 강한 회사”라며 “디저트 매장 역시 ‘매거진’처럼 테마를 바꾸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상품과 공간을 선보이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프라인 점포 대재앙 시대, 떡밥이 식기 전에 또 다른 떡밥을 뿌리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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