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가 끝난 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명동 거리. 상가 곳곳이 텅 빈 어항(魚缸)처럼 고요했다. 화장품 로드숍과 패스트 패션 매장, 프랜차이즈 음식점 쇼윈도 마다 내부를 가리는 흰 포렴과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유튜버들이 찾아와 전하던 ‘충격적인 명동 근황!’ ‘소름끼치는 유령 도시’ 영상은 결코 ‘낚시’가 아니었다. 한국부동산원 조사에 따르면 명동 상가는 지난해 4분기 기준 두 곳 중 한 곳(50%)이 비어있는 상태다.
‘그런 명동에 한국인이 간다고?’
기자가 이곳을 찾은 건, 코로나 직격탄을 맞고 추락한 명동이 최근 ‘한국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성지(聖地)로 부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명동은 ‘대한민국 쇼핑 1번지’란 수식어가 무색할만큼, 지난 10여년 간 정작 한국 젊은이들은 찾지 않는 ‘리틀 차이나’ 아니었던가.
팬데믹 전까지 명동 노점상에선 1만원짜리 랍스터구이·치즈가리비와 8000원짜리 꼬치 어묵을 팔았고, 화장품 매장에선 한국어가 서툰 중국인 아르바이트생이 손님을 맞이했다. 성형 관광 패키지가 유행하면서, 호러 영화처럼 얼굴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관광객도 잇따라 마주쳐야했다.
뉴욕 맨해튼 로컬 시민들이 대표 랜드마크인 ‘타임스퀘어’를 일부러 가지 않듯, ‘난징동루’(상하이 최대 상권)처럼 변해 가는 명동에 한국인이 낄 틈은 없어보였다. 그랬던 명동에 사회·문화 트렌드를 이끄는 핵심 소비층인 2030 세대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명동 콜링: 옛 대만대사관까지 발굴한 MZ
3일 오전 11시쯤, 주한중국대사관 맞은 편. 1950년대에 지어진 유럽 스타일 건물에 젊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대만기(旗)에서나 볼 수 있는 ‘청천백일(靑天白日)’ 문양이 붙어있었다. ‘하나의 중국’을 호소하는 중국대사관 코 앞에서 빛나는 대만 문양이라니, ‘사연 있는 건물’임이 분명했다. 이곳은 옛 건축 양식을 살려 2018년 재단장한 카페 ‘더 스팟 패뷸러스’다. 코로나 이후 오히려 더 유명세를 탔다.
붉은 중국 대사관이 내다 보이는 이 커피숍 창가는 마치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과거 ‘중국 삼민주의 동맹회관’이었던 건물에선 1992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까지 대만의 ‘반공(反共)’ 활동이 이뤄졌다. 소셜미디어에는 커피숍 인증 사진과 함께 중국과 대만, 한국의 외교 역사를 언급하는 게시물도 잇따른다.
커피숍에서 만난 서모(27)·정모(24)씨 커플은 “①명동교자나 하동관 같은 노포에서 식사를 하고, ②분위기 좋은 커피숍이나 칵테일 바, 레코드 숍을 돌아다니다, ③신세계 조명 장식(현재는 종료)을 보면서 인증샷을 찍는 게 요즘 인기있는 데이트 코스”라고 알려줬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즐길 꺼리를 애타게 찾다보니, 평소 절대 올 일이 없었던 명동까지 탐색하게 됐어요.”
김필균 더 스팟 패뷸러스 대표는 “그동안 한국인에게 외면 받는 명동 모습이 늘 안타까웠는데, 명동의 매력이 재부각되고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나는 건 참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2020년 12월, 명동에 ‘간판 없는 칵테일 바’를 연 이수원 명동숙희 대표 역시 비슷한 얘기를 전했다. “코로나에 큰 타격을 입은 업종이지만, 우리가 한남·청담·성수·을지로에 가던 사람들을 명동으로 끌어모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명동 리셋: 코로나가 부른 도시의 재발견
중국대사관 골목에서 빠져나와 명동성당 쪽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관광 인파를 헤치고 걷느라 10분 이상 걸렸을 거리를 명동 입구에서부터 단 3분 만에 도착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 커플들이 줄지어 성당 건너편 건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목적지는 한국YWCA연합회관(페이지 명동) 3층에 있는 ‘몰또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바’. 지난 9월 개장과 동시에 ‘오픈런’이 벌어졌다는 노천 카페다.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없는 이 야외 커피숍에선 지난 겨울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손님들이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찾고, 눈 오는 날이면 롱패딩을 입고 찾아온 것. 기자가 방문한 날(영하 1도)에도 에스프레소 잔을 잡은 손이 무척 시려웠지만, 80여명이 야외에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대체 왜?
커피숍에 도착해 뒤를 돌면, 의문이 풀린다. 장관이었다. 명동성당과 남산타워가 손에 닿을 듯 펼쳐졌다. 뭉게구름과 햇살이 서서히 움직이며 옅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번잡함의 대명사, ‘명동 한복판’에서 가슴이 뻥 뚫릴 줄이야. 성당 첨탑에 달린 종(鍾)이 기분 좋은 음역대로 낮 12시를 알렸다.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탁 트인 남산을 바라봤다.
그저 ‘핫 플레이스’라고 하기엔 근현대사에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생가 터이자, 1967년부터 한국 YWCA 연합회관으로 쓰인 이곳은 포스코 창업 초기, 본사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다. 독립운동부터 산업화, 민주화까지 대한민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최정민 몰또 대표는 “60년 전부터 존재해 온 이 건물은 지금껏 모두에게 개방돼 있었지만,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며 “멋진 경치가 소셜미디어로 금세 소문 나면서 지난 연말에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 영업시간 내내 손님 300여명이 긴 줄을 섰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명동은 ‘빼앗긴 땅’ 같았어요. 지역 생리가 온통 외국인 쇼핑객에게 맞춰져있는 곳이라, 주변 직장인과 시민은 찾지 않았죠. 코로나로 텅 비어버린 모습은 무척 슬프지만, 그로 인해 평범한 시민이 찾아오고 있다는 점은 기쁩니다. 역설적인 상황인거죠.”
팬데믹으로 초토화된 유령도시에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다. 연말연시마다 명동을 수놓은 백화점 장식에 새삼스레 환호했고, 역사가 깃든 건물과 아름다운 도심 경관을 찾아냈다. 이들은 골목을 누비며 LP판을 잔뜩 쌓아놓은 레코드숍, 독립서점, 김치찌개 골목, 칵테일 바를 발굴하고 있다. 명동은 다시 살롱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을까. 전염병은 공간을 바꾸고, 공간은 사회를 바꾼다. 지금 명동은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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