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3시00분00초, 한 식당 예약 애플리케이션. 작년 연말 서울 한강변에 생긴 레스토랑이 다음 달(3월) 예약을 받기 시작했다.
접수 시간이 되자, 예약 앱은 사용자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순식간에 먹통이 됐다.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을 껐다 켜봐도 마찬가지. 2분 뒤, 예약 현황을 알리는 달력엔 이런 문구가 가득했다.
120초 만에 한 달치 좌석(1840석)이 모두 나간 것은 물론, 취소석을 노리는 ‘빈자리 알림’ 대기자만 200명 이상이었다. 나훈아 콘서트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열기다.
◇그 섬에서 벌어진 ‘디지털 줄서기’
요즘 ‘서울에서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식당’이란 별명과 함께 ‘디지털 줄서기’ 소동이 벌어지는 신상 레스토랑이 있다. 고든 램지(영국 유명 셰프)가 차린 것도 아니고, BTS 멤버가 조용히 다녀간 것도 아니다. 스포트라이트 비결은 바로 식당 ‘위치’. 환상적인 수변 공간에서 파인 다이닝을 즐길 수 있어 개장 직후부터 예약 전쟁이 일어났다. ‘반포대교 남단 한강 인공섬’에 둥지를 튼 와인 레스토랑 ‘무드서울’이다.
한강 인공섬이라면?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섬’이다. 지난 2011년 9월, 서울시가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일환으로 민간 자본 1390억원을 투입해 완공했지만, 10년 간 정치권·시민단체·언론으로부터 두들겨 맞던 영욕(榮辱)의 섬.
당초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같은 랜드마크를 꿈꿨으나, 실상은 정치인들의 ‘종합격투기’ 무대로 활용되며 ‘흉물’ 취급을 받아야 했던 눈물의 섬. 그랬던 ‘세빛둥둥섬’(현재 명칭 ‘세빛섬’)이 최근 2030세대가 열광하는 ‘핫 플레이스’로 둥둥 떠오르는 중이란다.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서울 패션·음식·문화…세빛섬 상륙
일요일인 13일 오후 7시 30분쯤, 세빛섬 가장 안쪽 동(棟)인 ‘솔빛섬’. 섬 밖으로 산책을 즐기는 시민 몇명만 눈에 띄었을 뿐, 세빛섬 일대는 영업 끝난 유원지처럼 고요했다.
‘정말 인기있는 거 맞아?’
의구심을 잔뜩 품고 다가가 문을 열었더니, 이내 딴 세상이 펼쳐졌다. 400㎡(약 120평) 규모 1층 식당에선 손님 80명이 시끌벅적 와인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통창 너머로 한강이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남산타워가 빛나고 있었지만, 그동안 알던 서울이 아니라 낯선 휴양지에 온 느낌이었다.
인천에서 온 권모(26)씨 커플은 “한 달 전 친구 3명을 동원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예약에 성공했다”며 “1월에도 예약창이 열린 지 10분 만에 모든 자리가 마감됐다”고 전했다. “SNS에서 ‘#뷰깡패 #야경맛집’으로 뜨고 있어서, 하루빨리 와보고 싶었어요.” 방문객들은 이날 저녁 식사를 위해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1층과 반전된 분위기인 2층 공간(400㎡·약 120평)은 주말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선 유명 재즈 세션 ‘겟 올라잇’이 주말 저녁 라이브 연주를 한다. ‘세기말 기업 회식’ 분위기처럼 ‘부어라 마셔라’하는 만취객은 보이지 않았다. 방문객 대부분 젊은 층이었다. 실제로 포털사이트에서 이곳을 검색한 사용자 연령대 1위는 20대, 2위가 30대다. ‘서울 패션→서울 음식→한강 유람→공연 감상’으로 이어지는 MZ세대의 소비 사슬을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어 흥미로운 현장이었다.
◇세빛섬, ‘잃어버린 10년’
그럼에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서울시청을 출입하며 오세훈 시장의 퇴장과 박원순 시장의 당선을 취재했던 기자는 그동안 세빛섬을 다분히 ‘정치적인 공간’으로 기억해왔다. 당시 한쪽에선 이곳을 한강 르네상스 시대를 열 아이콘이라고 추켜세웠고, 다른 쪽에선 보여주기식 낭비 행정의 대표 사례(이른바 ‘세금둥둥섬’)라고 깎아내렸다.
효성 등 기업이 자금을 조달해 짓고 30년 뒤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민간 투자 사업이었지만, 사실상 시장 논리 위에 정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완공 전후로 펼쳐진 에피소드도 여럿이다.
명품 브랜드 펜디 모피 패션쇼 논란(2011년 6월), 장마철 안정성 시비(2011년 8월), 오세훈 시장 사퇴(2011년 8월), 박원순 시장 당선(2011년 10월), 서울시 특별감사로 관련 공무원 중징계(2012년 7월), 세금 낭비·사업자 특혜 의혹에 오 시장 검찰 수사의뢰(2013년 2월·2015년 무혐의 종결)….
시민을 위한 공간이 치열한 정쟁의 장(場)으로 변질되면서, 완공 3년이 지나도록 방치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다리로 연결한 세 개의 ‘빛 섬’이 한강에 둥둥 떠 있다는 뜻인 ‘세빛둥둥섬’은 2014년 10월에서야 세빛섬으로 이름을 바꿔 문을 열었다. ‘둥둥’ 표현이 ‘표류한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게 개명 사유였다.
세빛섬의 지난 10년 성적표는 처참하다. 2020년 기준 부채총계는 1206억원으로 자산총계 495억원을 넘어섰고, 자본총계는 마이너스(-) 711억원으로 완전 자본 잠식 상태다. ‘애물단지’라고 조롱받던 초기 이미지, ‘세빛섬의 수익성 추구 행위는 공공성에 배치한다’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으면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시는 매년 ‘세빛섬 공공성 확보사업’ 명단을 정해 효성 측에 주문해왔다. 관광객과 시민을 끌어모을 대규모 투자와 상품 개발이 서울시 규제에 가로막혔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런 세빛섬의 재발견 계기는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찾아왔다. 뉴욕 브루클린식물원이 코로나로 방문객이 크게 늘어나는 기회를 잡았듯(뉴욕타임스 보도), 서울 한강공원 역시 요즘 그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은 오프라인 만남을 포기하지 않았고, 한강으로, 서울숲으로, 남산으로 향했다. 인간과 자연이 재연결 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세빛섬의 잠재력을 읽은 이들이 나타났다.
세빛섬을 운영하는 효성티앤씨 관계자는 “2030세대 사이에서 와인 열풍이 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국내 와인시장을 개척한 1세대 와인 소매업체(‘와인나라’)에 지난해 입점을 제안했다”며 “우리도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와인나라 관계자는 “과거가 어떻든 현재 세빛섬 입지는 충분히 랜드마크가 될 승산이 있다”며 “다른 와인 레스토랑에 비해 압도적인 공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수를 띄웠다”고 소개했다.
이날 현장을 빠져나가기 전, 기자는 1만원대 잔술을 홀짝이던 박모(22)씨에게 다가가 “혹시 ‘세빛섬’의 과거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2011년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몰라요. 이렇게 멋진 공간이 그동안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긴 하네요.” 만년 적자 세빛섬은 둥둥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앞으로의 10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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