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 정동 분수대 앞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모여 러시아 전쟁 중단 촉구 집회를 열었다. 이날 참가한 유학생 우마(19·왼쪽)씨는 “한국에서 같이 응원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너무 크다”고 했다. /최원우 기자

“주최측이 누구세요?”

“너무나 한국적인 질문이네요. 주최측이 따로 없어요. 모두가 도움이 될 것을 찾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지난 20일 오전 서울 중구 러시아 대사관 정동 분수대 앞. 한 남성이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11 년전 유학생으로 한국땅을 밟은 로만 야마노프(35)씨. 지금은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한다는 그는 ‘노로만’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성씨를 빌렸다.

로만씨는 “한국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하나 둘 알음알음 모여 250명이 됐다”며 “지난달 2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주말마다 전쟁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150명 가량이 참석한 이날 집회는 4번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이들이 속한 단톡방 이름은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시위 날짜가 정해지면 “나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그린 마스크를 챙겨가겠다” “저는 전쟁 반대 팻말을 준비하겠다” “나는 국기” 식으로 각자가 글을 남긴다. 집회 현장에는 마스크에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국기 마스크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로만씨는 “이렇게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때까지 계속 집회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지난달 27일 러시아 대사관이 위치한 정동에 모였다. 이때부터 매주 일요일 3번의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도하는 국내 유일한 반전 집회다.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한 노로만씨는 "우크라이나 동부에 할머니가 계신데, 4일 이후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 했다. /최원우 기자

35세인 로만씨에겐 이번이 태어나 두번째 전쟁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공격했을 때 그의 가족이 크림반도에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렸다. 이때 함께 목소리를 냈던 재한우크라이나인들이 이번에도 뭉쳐서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로만씨는 “당시 얘기는 자세히 얘기하기 조심스럽다”면서도 “지금이 전쟁 규모가 훨씬 크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다.

두 번 겪는다고 전쟁의 충격이 약해지는 건 아니다. 로만씨는 가족 걱정이 크다. “우크라이나 동부에 할머니가 남아있는데 지난 4일 마지막 연락 이후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며 “마지막 연락했을 때도 주변에 폭발음이 들렸었다. 무사한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고 했다.

20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 정동 분수대 앞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모여 러시아 전쟁 중단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최원우 기자

로만씨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집회에 참석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크라 국기, 국기를 그린 마스크가 대부분이었다. ‘스톱 푸틴’, ‘우크라이나를 구하자’, ‘전쟁을 멈춰라’ 등 팻말을 든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패션도, 문구도 제각각이었다. 표정은 비장하면서도 한편으론 밝았다.

전쟁 중단 촉구 집회에 참가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이 'STOP PUTIN'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다. /최원우 기자

집회가 시작되자 로만씨는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슬라바 우크레이니, 제로임 슬라바!(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영웅들에게 영광을!)”

시위에는 한국인도 수십명 눈에 띄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유학하다 전쟁 때문에 귀국한 우태규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에 온 지 2주 정도 됐다. 우크라이나 친구를 두고 도망쳐 나온 마음이 들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한국인 집회 참가자들도 ‘슬라바 우크레이니’를 따라 외쳤다.

로만씨는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의 ‘정’을 크게 느꼈다”고 했다. 회사 동료들은 단톡방에서 그를 응원했고, 그의 사정을 아는 지인 대부분이 후원금이나 구호품을 어디로 보내면 되겠느냐고 물으며 격려해줬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들의 응원이 많은 우크라이나인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러시아 전쟁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민간인 살상을 중단하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대한민국 감사합니다” 등 구호를 외치며 시청역, 염천교를 돌아 출발지까지 행진했다. /최원우 기자

이날 집회에 참가한 우크라이나 유학생 우마(19)씨도 “한국에서 같이 응원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너무 크다”고 했다. 집회를 위해 일산에서 왔다는 김성용(26)씨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응원이라도 하려고 나왔다”고 했다. 이들은 “민간인 살상을 중단하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대한민국 감사합니다” 등 구호를 외치며 시청역, 염천교를 돌아 출발지까지 행진했다.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매주 일요일 같은 장소에서 반전 집회를 열 계획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19일(현지시각) 기준 전쟁으로 민간인 최소 902명이 숨지고 1459명이 다쳤다. 대부분 다연장 로켓포, 미사일 등 포격으로 숨졌고 실제 인명피해는 집계된 것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는 우크라이나 인구 344만명이 국외로 피난했고 이 중 90%가 여성과 아동이다.

20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 정동 분수대 앞에서 김성용(26)씨가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고 있다. 김씨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응원이라도 하려고 나왔다”고 했다. /최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