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이 ‘한국령 표석’을 세우고 기념촬영하는 모습. photo 한국산악회

지난 6월 8일 오전 울릉도 저동 촛대바위 앞에서 열린 독도 폭격사건 74주년 ‘위령행사’에서 서예가 율산 리홍재 선생은 ‘큰 붓 타묵(붓으로 글을 친다)’ 퍼포먼스로 폭격사건 희생자를 추모했다. 그는 ‘천하제일 해 뜨는 돌섬, 늘 푸른 독도’라고 적었다. 독도 폭격사건 위령제는 1948년 6월 8일 낮 12시 주일 미공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를 훈련장으로 삼아 폭격하는 바람에 희생된 어민들을 기리는 취지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다. 해마다 사건이 발생한 6월 8일 독도에서 열려왔는데 올해는 기상 사정으로 울릉도에서 개최됐다.

당시 독도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1948년 6월(1차)과 1952년 9월(2차) 두 차례 있었다. 1차 폭격에서 안타까운 민간인 희생까지 발생했으나 결과적으로 두 번의 폭격은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더욱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사태로 인해 미국이 공식적으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산악회 울릉도ㆍ독도 학술조사단장이었던 홍종인 조선일보 주필이 1953년 10월 15일 독도에 ‘한국령 표석’을 세우고 있다. 한국산악회는 내년 독도 표석 70주년을 기념해 독도 등반 등의 기념행사를 열 계획이다. photo 한국산악회

두 번의 폭격으로 한국의 ‘독도 주권’ 확인

미군정 시기인 ‘1차 폭격사건(1948년 6월)’ 해결에는 조선일보가 큰 역할을 한다. 독도가 폭격연습지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47년 9월 16일이었다. 독도가 훈련 장소로 지정된 것은 독도가 동해 먼바다에 위치해 있어 장거리 비행 후 폭격 연습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점과, 미·소 냉전 상황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전략상 주요한 지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48년 사건 당시 주한미군은 육군인 미 제24군단이 주축이었다. 반면 독도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5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이용되었다. 1948년 6월 8일 독도에서 폭격연습을 한 부대는 오키나와 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폭격기대인 제93중폭격비행단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광복 후 독도와 언론보도(홍성근 편)’에 따르면 1948년 폭격사건 당시 마침 서울과 지방의 신문기자들이 시찰차 울릉도에 체류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울릉도에서 폭격사건 소식을 접한 즉시 기사를 작성하였다. 무선통신을 이용하여 기사를 본사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기사는 사건 발생 후 3일 만에 나왔는데, 1948년 6월 11일 조선일보 윤고종 기자가 쓴 단독 기사였다. 그 후 경향 각지의 신문들이 일제히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UP와 로이터 등 해외 통신사들도 미국 현지로 기사를 타전하였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1948년 6월 11일 첫 기사가 미국 신문에도 나왔는데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실렸다. 그 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성조지(Stars and Stripes) 등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1948년 6월 11일 조선일보 첫 보도 이후 7월 말까지 국내외 신문에 보도된 관련 기사가 최소 480여건이었다. 국내적으로 보면, 좌·우익 등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신문이 이 사건을 다루었다. 국민들은 언론보도를 통해 사건의 내용과 경과, 그리고 각 정당과 사회 각계각층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한편 언론사에서는 피해자 유족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펼쳤고,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국민들로 하여금 독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48년 사건 직후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부에서는 신속히 특별조사단을 꾸려 독도 현지로 파견하였다. 또 소청위원회를 조직하여 피해 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미군 측에서는 사망자 14명 중 12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2명은 유족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지급하지 못했다. 보상금액은 피해자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어떤 유족에게는 당시 돈으로 40만원을 주었고, 또 다른 유족에게는 6만원을 준 경우도 있었다. 선박 피해에 대해서도 보상을 하였는데, 보상금액이 턱없이 적다고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사건 처리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부가 담당했다. 서울의 미군정청은 도쿄에 있는 극동사령관에게 독도에 대한 연습폭격 중단을 요청했고 이후 폭격이 중단됐다. 사건 발생 후 보상이 신속하게 이뤄지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우리 측 요구를 미국이 수용한 일련의 과정은 이후 미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독도 폭격사건은 6·25전쟁 당시 또 한 번 벌어졌다. 1952년 9월 벌어진 독도 2차 폭격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을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은 이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에 항의하며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1952년 7월 독도를 미공군 폭격연습지로 다시 지정한 것이었다. 이 ‘2차 폭격사건’은 아직도 일본 측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측은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를 통해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 행정절차를 논의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6월 8일 울릉도 저동 촛대바위 앞에서 열린 독도 폭격사건 74주년 위령행사에서 서예가 리홍재 선생이 ‘큰 붓 타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photo 이정현 기자

홍종인 기자가 현지서 타전한 2차 폭격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광복 한 달 만인 1945년 9월 15일 설립된 조선산악회(1948년 한국산악회로 명칭 변경)이다. 한국산악회에서는 1952년 8월 15일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영토표석을 만들어 독도 현지에 세우려고 했다. 당시 한국산악회 독도 학술조사단장은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홍종인 기자. 당시 한국산악회 부회장이었던 그는 1952년 독도 학술행사를 추진하면서 그해 9월 15일과 22일, 24일 한국산악회 조사단을 이끌고 독도를 방문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폭격연습지로 지정한 독도에 미군이 실제 폭격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홍종인 회장은 즉시 전신으로 정부 관계기관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조선일보에도 알렸다. 이후 한국 정부의 거듭된 요청으로 미국 측은 1952년 12월 독도를 더 이상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해왔다. 1953년 2월 한국 국방부는 “향후 독도에서 폭격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발표는 한국 정부와 UN군 당국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미 극동공군사령관도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 내용을 보장해주었다고 했다. 2차 독도 폭격사건이 발생한 1952년은 6·25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측으로부터 더 이상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을 얻어낸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변기태 한국산악회장인터뷰

지난 6월 8일 오후 울릉도 패밀리호텔 세미나실에서는 ‘독도 6·8 사건’ 전문가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변기태 한국산악회장은 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한국령(韓國領) 표석’을 세운 지 70주년을 기념해 한국산악회 차원에서 독도 등반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 광복 이후 한국산악회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한국산악회는 광복 후 한 달 만인 1945년 9월 15일 창립됐다. 국가 정체성, 국토에 대한 개념이 약했던 시기다. 한국산악회는 이 시기 거의 유일하게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인식을 국민과 정부에 심어 주었다. 초대 송석하 회장은 진단학회 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단학회 학자들과 산악인들이 합심해서 국토구명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때 찾은 곳이 울릉도와 독도다. 당시는 뱃길도 없었다."

- 한국산악회 '한국령 표석'이 가지는 의미는.(한국산악회 '한국령 표석'은 원래 1952년 8월 15일 설치하려 했으나 폭격사건으로 다음해 설치됐다. 하지만 표석에는 원래 예정했던 '1952년 8월 15일'로 적혀 있다.) "(광복일을 기념해서) 국민들에게 이곳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금도 독도는 가기가 힘든데, 그 당시는 더욱 힘들었다. 전쟁 와중에 우리 정부가 독도 영유권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을 때 산악단체가 먼저 관심을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 결국 1953년 10월 15일 표석을 세웠다. 내년이 표석을 세운 지 70주년인데 준비 중인 행사는. "사람도 고희 행사가 있는 것처럼 70주년을 준비 중이다. 등반대회와 학술행사 등을 준비하고 있다."

- 홍종인 당시 독도 학술조사단장(1954년 한국산악회장 취임)의 역할은. “언론인으로 영향력도 굉장했다. 청소년들을 적극 참여시켰는데, 한라산도 갔고 독도에서 캠핑도 했다. 그 당시 청소년이 이제 80대 중반이 됐다. 그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행사가 평생 자기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 우리 국토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든 것 자체가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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