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8일 울릉도에서 열린 위령행사에 참석한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photo 이정현 기자

지난 6월 8일 울릉도에서 열린 ‘독도 폭격사건’ 위령행사에서 만난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울릉도 출신 독도 전문가이다. 1950년대 중반 독도를 지켰던 홍순칠(1929~1986) 독도 의용수비대장이 큰아버지다. 그는 ‘광복 후 독도와 언론보도’라는 저서 편찬에 관여하는 등 독도 폭격사건을 연구해 왔다.

- 독도 폭격사건을 연구해온 이유는. "'독도 폭격사건'은 1948년과 1952년에 있었다. 1948년에는 독도에서 조업을 하던 다수의 우리 어민들이 희생되었고, 1952년에는 한국산악회 학술조사단이 독도에 입도하려고 할 때마다 폭격이 있어 결국 입도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나로서는 이 사건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피해는 어느 정도였으며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 사건이 독도 영유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러한 의문들을 밝히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 미군의 폭격 훈련으로 독도에 손상이 있었나. "1948년 폭격사건의 경우, B29 폭격기 20대가 1000파운드(500㎏)의 폭탄을 76개나 투하하였다. 1948년 사건 직후 독도 현지에 갔던 울릉도 경찰관은 '사건 전에 섬은 상당한 돌각이 있어 삐죽삐죽했는데, 사건 후에 가보니 폭탄과 기총으로 몽글몽글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독도에 상당한 손상이 있었던 것이다."

- 광복 이후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 전신)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의 독도영유권 관련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광복 후 한국산악회에서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을 3차례 파견했다. 1947년 제1차 학술조사단이 파견되었는데, 그때는 과도정부였지만 외무처 일본과장, 문교부 편수사 등으로 구성된 독도조사단이 파견됐다. 한국산악회와 과도정부는 당시 울릉도청에서 1906년 심흥택 울릉군수가 쓴 독도 보고서를 발굴했다.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라는 울릉도 주민 진술도 확보하였다. 또한 독도에 가서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표목을 세우고 독도의 지리, 동물, 식물 등에 관한 내용도 조사하였다. 독도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1952년 조사 때는 폭격사건으로 독도에 입도하지 못했지만, 이후 1953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영토표석을 세웠다. 당시 독도의 측량지도도 처음 제작하게 되었다."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전에 독도 영유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 "광복 후 미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다. 한국을 통치했던 주한미군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여 관리·이용토록 했다. 일본을 점령·통치했던 연합국최고사령관도 지령(SCAPIN 677)을 내려 독도를 일본의 통치영역에서 제외하였다. 1947년 이후 미국이 추진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초안 작성과정을 볼 때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1949년 12월 이후 미국이 내부적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이후에도 여전히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이용·관리되었다. 이것은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서 배제시킨 연합국최고사령관 지령(SCAPIN 677-1) 등에 의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 당시 주한·주일미군 모두 독도를 폭격훈련장으로 이용했나. "1948년 사건 당시 주한미군은 미 제24군단으로 육군 부대였다. 독도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5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이용되었다. 1948년 6월 8일 독도에서 폭격연습을 한 부대는 오키나와 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폭격기대인 제93중폭격비행단이었다."

- 1948년 당시 우리의 대응은. "1948년 폭격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일어났다. 그래서 사건 처리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부에서 담당하였다. 미군정청에서는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관에게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미군 측에서는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실제 중단하였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지만, 과도정부 경무부에서도 이 사건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정부 수립 전에 구성된 국회에서도 진상 조사 방법에 관해 논의를 진행했다. 경무부로부터 사건 현황을 보고받기도 하였다."

- 일본 정부의 대응은. "독도 폭격사건은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내지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영자신문 'Japan Times' 한 곳에서만 이 사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는 정도였다."

- 일본이 1952년 독도를 '주일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한 이유는 뭔가. "한국 정부가 1952년 1월 평화선을 선언하자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평화선 내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에 항의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한국의 평화선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한 방향에서 1952년 7월 일본 정부는 주일미군을 유인하여 독도를 미 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하였다. 그렇게 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일본 정부는 그러한 내용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은 서로 정보를 교류했을 텐데 1952년 주한미군이 독도가 '주일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1948년 폭격사건으로 다수의 어민들이 희생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독도 조업이나 방문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더욱이 1952년은 6·25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한국산악회에서는 제2차 독도 학술조사를 앞두고 1952년 4월 독도가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어 있는지를 한국 공군 고문관을 통해 미 제5공군에 조회하였다. 5월 4일 자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고, 폭격연습지로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런데 1952년 7월 일본에 의해 갑자기 독도가 폭격연습지로 지정된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이승만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다고 보나. "1952년 당시는 6·25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측으로부터 더 이상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을 얻어낸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두 번의 독도 폭격사건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이 확인된 것인가. “1948년 독도 폭격사건 후 주한미군은 특별조사단을 파견하여 한국 어민들에 대한 구조활동을 펼치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당시 미군정청은 독도에 대해 ‘한국 어민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주요한 터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였다. 1952년 독도 폭격사건 때는 한국 정부의 폭격 금지 요청에 대해 미군 당국에서 ‘폭격연습을 중단할 것’이라고 통보했고 또 실제 중단하였다. 이 두 사건은 불행한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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