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8시 30분쯤 서울 구로구 개봉동 개웅산 자락에 선 e푸른아파트 주변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아파트 야외 주차장은 높이 7m, 두께 16cm인 옹벽을 사이에 두고 산과 맞닿아 있는데, 주차장으로 갑자기 크고 작은 흙더미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하나둘 떨어졌다. 몇 분 뒤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옹벽과 주차장을 넘어 아파트로 들이닥쳤다.
당시 집 창문으로 이 장면을 우연히 본 후 다른 집 문을 쿵쿵 두드리며 “산이 무너져요! 나오세요!”라고 소리 높여 외친 사람이 있었다. 아파트 5층에 사는 주민 배필순(64)씨였다. 7층짜리 2개 동(棟)인 이 단지에는 36가구에 97명이 사는데 가구 수가 적어 평소 이웃끼리 서로 얼굴을 다 알고 지낸다고 한다. 배씨는 “혹시라도 아파트가 무너질까 봐 겁이 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문을 두들겼다”고 했다. 배씨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불러낸 주민들도 함께 다른 집 벨을 누르거나 계단을 뛰어다니면서 이웃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주민 강모(67)씨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비는 쏟아지는데 사방에서 “엄마, 아빠” 하고 아이들이 우는소리가 들렸다”며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꼭대기 층인 7층까지 올라가서 모든 집 문을 두들기고 다녔다”고 했다. 다행히 개웅산은 추가로 더 무너지지 않은 채 아파트 1~3층에만 피해를 주고 끝났다.
지난 8~9일 서울 등 중부지방을 덮친 기록적인 폭우 때 대형 참사나 피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웃들을 생각한 이 아파트 주민 같은 의인(義人)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8일 서울 구로구 개봉동 e푸른아파트 주민들은 뒷산 붕괴가 멈춘 뒤 다 함께 다른 이웃을 구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작업에 나섰다. 당시 강남권 폭우로 수백 건의 신고가 소방서로 밀려들어 소방차 도착이 계속 늦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자루를 구해와 토사를 쓸어 담고, 어떤 주민은 전기 시설이 물에 젖지 않도록 분리수거용 포대에 흙을 담아 지하실 입구를 막았다. 맨손으로 배수구를 막고 있던 흙더미와 나뭇가지, 쓰레기 등을 치우는 주민들도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평범한 이웃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강남역에서는 지난 8일 밤 한 남성이 비를 맞으며 맨손으로 빗물받이 덮개를 연 뒤 안에 쌓인 쓰레기를 꺼내서 물이 잘 빠질 수 있게 했다. 그는 소셜미디어 등에서 ‘강남역 수퍼맨’이라고 불렸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동에 사는 박옥순(68)씨도 지난 8일 밤 비를 맞으며 맨손으로 배수구에 쌓인 쓰레기와 낙엽 등을 치워 동네에서 화제가 됐다. 박씨는 “동네가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했다.
물이 쉽게 차는 반지하 집이 많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갇힌 사람들을 탈출시켜주는 장면도 잇따랐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는 주민 한백호씨와 박병일씨, 유인철씨 등 3명이 망치를 들고 몇몇 집을 돌며 방범창을 뜯어내 주민 5명을 구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반지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신림동 가족 3명도 당초 이웃들이 이들을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었다. 또 8일 오후 서울 동작구 성대시장 인근 빌라에서도 중국 동포 임성규(65)씨가 같은 빌라의 반지하 집에 사는 노인 2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당시 반지하 집 안에는 물이 무릎 높이까지 차서 수압 때문에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살려 달라’는 외침을 듣고 달려온 집주인 부부와 임씨가 함께 창문의 방범창을 뜯어냈고, 노부부를 이 창문으로 꺼내 올렸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이 모인 인터넷 사이트나 단체 대화방 등에도 “비 오는 날 도움을 주신 분을 찾습니다”라는 내용의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서초구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영장 간 아이가 폭우 때문에 길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안경 낀 아저씨가 길을 안내해주고 같이 와주셔서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정말 감사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또 다른 커뮤니티에도 “노량진에서 버스 타고 오다가 비 때문에 처음 보는 곳에 내려 물살에 휩쓸려 넘어져 울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도움을 준 시민분을 찾고 싶다”는 글이 올라왔다.
사방에서 도움 요청이 잇따르는 8~9일 소방관과 경찰관들도 묵묵히 시민들을 구했다. 지난 8일 오후 8시 20분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주택 반지하층에 살던 권용욱(55)씨와 박효신(52)씨 부부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당시 두 사람은 안방에 앉아 TV를 보며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집에 물이 차오르는 걸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소방에 수차례 신고를 하고 창밖으로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위층에 사는 50대 아주머니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내려와 물을 퍼나르며 창문의 방범창을 뜯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9시 40분쯤 서울 관악소방서 소속 김한기(30) 소방사와 이창현(32) 소방사가 나타났다. 계속 반지하로 물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10여 분간 물을 퍼낸 뒤 간신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구해냈다. 두 소방사는 두 사람을 구한 후 간단히 인사만 한 채 또 다른 구조 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서 대림지구대 민수(42) 경위와 김진희(43) 경사도 지난 8일 밤 반지하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노인 2명을 간신히 꺼냈다. 정전으로 어둠 속에서 노인들을 살리려고 60대인 딸이 물을 퍼내고 있었다고 했다. 두 경찰관은 쉬는 날이었던 지난 10일에도 이 집을 찾아 집기를 들어내고 정리하는 걸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