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시간당 10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진 경북 포항에서만 이날 오전 기준 시민 8명이 침수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 8월 초 서울 강남권에서도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도 한 시민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하는 등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지하 주차장에서 고립되는 일이 있었다. 도심의 경우 최근 주차 공간 부족 등으로 지하를 깊게 파 주차장을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상기후 등으로 특정 지역에 기습적으로 폭우가 잇따르면서 도심 지하 주차장 등 지하 공간이 사실상 수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폭우가 내리는 상황에서 지하 주차장 등 지하 공간은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평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특히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지하 공간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성인 무릎 바로 아래인 40cm 수심에서는 수압으로 인해 출입문을 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무릎 높이(45.5cm) 이상의 침수 상황에서는 남녀 불문 대피가 불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현행법에는 지하 공간의 침수를 막기 위한 건물 설계 기준이 제대로 명시돼 있지 않다. 행정안전부가 고시한 ‘지하 공간 침수 방지를 위한 수방 기준’에 따르면 지하 주차장을 포함한 지하 공간에는 출입구에 방지턱과 차수판(건물에 물이 들어오지 않게 막는 방지판)을 설치하고, 배수를 위해 배수펌프 등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침수 피해가 우려된다고 인정하는 지역’으로 한정돼 있다. 과거 5년 이내 1회 이상 침수가 되었던 지역 중 비슷한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이나 자연재해대책 시행령에 따라 침수위험지구 및 해일위험지구로 지정된 곳을 가리킨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자기 지역을 침수 피해가 우려되는 곳이라고 정하는 지자체는 많지 않다”면서 “비용이 더 드는 만큼 건물주나 입주자 등이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한 지하 침수 방지 시설을 짓는 경우도 드물다”고 했다. 정부도 어떤 지자체가 자기 지역을 침수구역으로 정하는지, 차수판 설치 의무를 적용하는지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중앙부처에서는 침수구역이 정확히 몇 곳이나 되는지, 어디인지 파악이 어렵다”고 했다. 또 침수구역으로 지정됐더라도 그 지역에서 침수 방지 시설을 건물 면적이나 높이에 따라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명확한 규격도 없다.
건설업계 등에 따르면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지하 공간에 대한 침수 방지 시설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도 최근 10년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다. 이보다 더 전에 지어진 국내 대다수 건물들은 사실상 이런 기록적 폭우에 속수무책이란 뜻이다. 예컨대 서울 서초구의 경우 지난 2011년 우면산 산사태 이후 그해 8월부터 새로 신축 허가를 받는 건물 중 지하층이 있는 경우는 차수판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지하 주차장 침수 피해가 있었던 서초구 반포자이 아파트의 경우 2009년 3월 입주한 곳이라 이런 시설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로 인한 집중호우가 계속될 수 있는 만큼 지하 주차장 등을 포함한 도심 지하 공간에 대한 안전 규정을 재정립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명기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지하 주차장은 거대한 동굴 같은 곳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흘러 들어올 수밖에 없다”며 “처음 공사를 할 때부터 지하 주차장 배수 용량을 늘릴 수 있는 설계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이미 완공된 건물의 경우 의무적으로 차수판, 차수막을 설치하고 배수펌프를 여러 대 배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재 소방법상에도 일부 시설에만 차수판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고, 민간 건축물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며 “기본적인 안전을 위해서라도 지하 주차장이 있는 건물은 차수판 설치를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