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 잡내를 빼려면 어디에 담가 놓아야 할까요?”

지난달 19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구 ‘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중년 남성 요리 교실’. 강사 김남희(48)씨가 닭볶음탕 만드는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소금물!” “뜨거운 물!” “막걸리!” 꽃무늬 앞치마를 입은 60대 남성 9명 사이에서 제각각의 외침이 나왔다. 하지만 모두 오답(誤答). 정답은 ‘우유’였다.

이 9명은 모두 최근 5년 새 직장에서 나온 퇴직자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요리는커녕, 단 한 번도 도마 앞에 서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강좌 내내 이들은 좌충우돌했다. 감자 껍질을 서툴게 벗기다가 떨어뜨린 감자 줍는 소리가 곳곳에 울렸고, 양념을 넣기도 전에 파만 먼저 볶다 파를 태워 강사에게 잔소리도 들었다.

이들에게 ‘요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원래 이들 같은 중·장년 상당수는 과거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직장 등 가정 밖 경제활동에만 몰두한 경우가 많았다. 퇴직 후 갑자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지만 가사(家事)에 참여하는 게 낯설고 가족들과 오래 함께 있는 걸 어색해하곤 했다.

지난달 19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구 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중년 남성 요리교실’에서 고성규(60)씨가 닭볶음탕을 만들고 있다. 고씨는 지난달 초 공기업에서 퇴직했다. 그는 요즘 난생처음 요리를 배우며 가사를 경험하는 중이다. /김지원 기자

지난달 초 공기업에서 퇴직했다는 수강생 고성규(60)씨도 자신을 ‘삼식이(집에서 아내가 차려주는 세끼를 먹는 남성)’라고 소개했다. 그는 “집에서 계속 삼식이로 지내면 아내와 사이가 멀어질 것 같아 이 수업에 등록했다”며 “매주 목요일 저녁은 내가 만들어온 음식으로 해결하는데 아내가 칭찬을 해주니 가정도 더 밝아진 것 같다”고 했다. 이종표(65)씨도 “나에게 ‘요리’는 가족과 소통하게 해준 계기”라고 했다. 그는 “전에는 아내가 요리를 하고 있으면 ‘내가 저걸 어떻게 해’ 하면서 시도조차 안 했는데, 요즘은 국 끓이는 것 하나를 놓고도 아내와 오순도순 대화를 하게 돼 정말 좋다. 아이들도 칭찬해 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요리가 중·장년 남성이 가사에 참여하는 시작일 뿐만 아니라, 홀로 되었을 때 스스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지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처지의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심리적 위안을 얻게 된 이들도 있다. 경기 안산에 사는 이영수(69)씨는 합창단 활동으로 퇴직 후 삶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2019년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지사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 경기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평생 대학 ‘중년남성중창단’에 합류했다. 쭈뼛거리며 처음 만났던 남성 13명은 12주 과정을 마친 후, 가족 모임까지 하는 오랜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그는 “30여 년 동안 일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처음 갖게 된 취미 생활과 새로 생긴 친구라 더없이 소중하다”고 했다.

전남 영암군에선 작년 8~11월 50~60대 남성 14명을 대상으로 연 ‘드럼 수업’이 인기였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박흥관(62)씨는 “시골 사람이라 퇴직하고 농사나 짓자 했었는데 어느 날 인생을 돌이켜보니 마땅한 취미 생활 한번 가져본 적 없더라”고 했다. 그는 “매주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삶에서 매우 큰 비중이었던 직장이 사라진 뒤 중년 남성들은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며 “지자체의 각종 프로그램 등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란 걸 확인받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퇴직 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크게 늘어나는 만큼, 등산이나 영화 감상 등 가족과 공유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박형근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덥다고 느낄 정도의 강도로 매주 3회 이상, 한 번에 30분 이상 9주 넘게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