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에 끌려가는 독립투사들이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형장 옆 ‘통곡의 미루나무’<사진1>는 해방 이후 심은 나무임이 밝혀졌다. 많은 매체와 서적은 물론 역대 정부에서는 이 나무를 독립투사들의 상징으로 부각시켜왔다. 그런데 본지 확인 결과 해방 직후는 물론 식민시대 촬영한 사진에도 이 미루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투사의 한이 서린 나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은 괴담임이 드러난 것이다. 역사관측은 이 나무를 ‘사형장을 세울 당시에 심었다는 미루나무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이 원통한 마음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전해진다’라고 소개해왔다. 지난 2020년 이 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자 역사관 측은 미루나무를 쓰러진 자리에 놔둔 채 보존 여부를 논의해왔다. 여러 시민단체에서는 ‘독립정신의 상징’이라며 미루나무 보존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3·1절을 맞아 서울시에서도 자체 가상공간인 서울시 메타버스에 이 ‘통곡의 나무’를 부활시켰다.
1945년 사진에 없는 미루나무
1일 본지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확인한 결과, ‘공중에서 본 인천 전경(7)’이라는 문서명(문서번호: IM0000137829)으로 아래 <사진2>가 보존돼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미해군 항공기가 촬영한 사진이다. 제목과 달리 인천이 아니라 서울 상공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서대문형무소 전경이 자세하게 촬영돼 있다. 붉은 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바로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보존돼 있는 사형장 구역이다. 선 가운데 작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부분이 사형장이다.
‘통곡의 미루나무’는 이 담장 오른쪽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런데 1945년 미군 항공사진에는 그 모퉁이가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공터다. 대신 사형장 입구 정면에 미루나무와 달리 수형(樹形)이 둥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항공사진의 표시 부분을 확대한 아래 <사진3>을 보면 이같은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위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던 사형장 담장 모퉁이에는 그 어떤 구조물이나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식민시대인 1920년대 사진에도 이 미루나무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1920년대 전반 촬영된 <사진4>와 1920년대 후반~1930 촬영된 <사진5>에도 사형장 옆에는 그 어떤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관측은 이 나무를 ‘1923년 식재된 나무’로 설명한다. 따라서 심은지 몇 년 되지 않은 어린 나무를 이 두 사진으로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1945년 항공사진에는 미루나무가 없는 사실이 명확하게 촬영돼 있다. 그 사이에 원래 있던 나무를 베어버렸거나 아니면 애시당초 ‘통곡의 미루나무’는 없었다는 증거다.
연못으로 변한 옛 사형장
이 사형장은 1923년 무렵 ‘서대문감옥소’가 ‘서대문형무소’로 확장개편되면서 만들어진 사형장이다. 사형장은 이전에는 현재 역사관 구내 연못 자리에 있었다.
아래 대한제국시대인 1908년 경성감옥 배치도(맨 왼쪽)를 보면 지도 오른쪽 위에 ‘교죄장(絞罪場)’이 표시돼 있다. 교죄장은 사형장을 뜻한다. 가운데 붉은선으로 표시된 凸자 건물은 ‘즉결감방’이다. 1923년에 총독부가 작성한 ‘서대문형무소 재래청사, 의무실 기타 이전 모양체 공사 설계도’(가운데)에는 기존 건물들을 ‘점선’으로 표시하고 실선으로 신축할 건물을 표시해놨다. 1908년 지도 한가운데 파란색으로 표시한 凸자 건물 ‘즉결감방’도 이 지도에는 철거 예정 건물로 점선으로 표시됐다.
이 두 지도를 겹치면 이미 교죄장(사형장)은 보이지 않는다. 점선으로도 표시돼 있지 않다. 즉 1923년 이전에 이미 이전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1940년 ‘서대문형무소배치도’에는 옛 사형장 자리에 ‘연못[池]’이 조성돼 있다. 이 연못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21년 1월 19일 서대문감옥소장으로 부임한 土居寬申라는 사람은 ‘중앙부에 위치한 사형장을 제일 먼저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라고 회고했다.(서운재 역, ‘일제강점기 조선 행형의 이야기’, 북트리, 2020, p14. 이승윤, ‘1908~1945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의 실제와 성격’, ‘서울과 역사’ 108호, 서울역사편찬원, 2021, 재인용)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그가 부임한 날짜는 1921년 1월 19일이다. 따라서 1921년 1월부터 위 설계도를 작성한 1923년 사이에 사형장이 이축됐다는 뜻이다.
이 사형장에서 처형된 독립투사는 18명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그 1922년 이후 1945년까지 이 사형장에서 형이 집행된 사람은 모두 195명이었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은 18명이었다. 나머지는 잡범과 강력범들이다. 예컨대 1942년에 사형당한 18명 가운데 14명은 살인귀 백백교 집단이었다.(이승윤, 앞 논문) 그러니까 설사 식민시대에 ‘통곡의 미루나무’가 존재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나무에서 통곡했다는 독립투사는 18명이고 나머지 177명은 처벌해야 할 범죄자라는 뜻이다.
또 미루나무가 있었다고 가정해도 그 나무를 부여잡고 통곡했을지도 의문이다. 1930년 11월 1일 잡지 ‘삼천리’ 10호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좌익운동가 임원근(林元根)의 ‘옥중기(獄中記)’가 실려 있다. 경성이 아닌 평양감옥에서 그가 본 사형수들은 모두 ‘머리 우에 용수를 푹 숙여쓰고 도살장에 들어가는 우마(牛馬)처럼 사형장으로 걸어갔다’고 기록했다. 설사 미루나무가 있었다 할지라도 용수를 씌워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키가 빨리 자라고 일찍 죽는 미루나무를 근거없는 신파조 애국심의 도구로 쓰지 말라는 말이다. 선열에 대한 선양이 아니라 괴담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