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의 재건·부흥을 위해 한·미 유력 인사들이 설립한 비영리기관 ‘한미재단’의 미공개 자료를 주간조선이 입수했다. 이 자료에는 한미재단의 미국 측 실무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그리고 국내 지자체장들과 직접 주고받은 서신, 박 전 대통령이 재단에 하사한 휘호, 국회·검찰·언론·기업 인사들로 구성된 재단 주요인사록, 회원 명단, 장학생 명단, 재단 소식지, 훈련 교본 등이 있다. 모두 한국전쟁 직후 재단 활동이 왕성하던 시기에 남겨진 것들로,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한·미군사동맹이 발판이 됐다.
자료의 내용들을 보면 한미재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력했던 근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재단 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한미재단의 농촌개발사업이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을운동의 기틀을 형성했다는 점이 이목을 끈다.
한미재단은 지난 1952년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의 권유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등이 설립을 주도해 미국 백악관에서 발족한 단체다. 한미재단에 몸담았던 국내 관계자들은 재단이 민간단체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까지 경제·농업·주택·교육·보건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원 사업을 벌였고 5000만달러가 넘는 원조를 하는 등 전후 한국 재건에 실질적 기여를 했다는 데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1970년대 경기도 농촌진흥원에서 한미재단 사업을 지원했던 이양수(81)씨는 “안타깝지만 재단의 성과가 지금에 이르러 잘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재단이 대한민국 안정화에 상당 부분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1978년 한미재단 교육 수료생이자 동문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이창호(69)씨는 “활동 내용을 보면 한·미군사동맹이 국방을 뛰어넘어 여러 민간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400쪽 교본으로 농업 실무교육
한미재단이 국내서 벌인 사업은 1972년 발행한 ‘한미재단 창립 제20주년 기념집’에 잘 담겨 있다. 이 기념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단 부총재인 프로스트 박사에게 보내는 친서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박 전 대통령은 “한국을 위한 사업에서는 결코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사(프로스트 박사)의 말씀에 감동된 바 있습니다”라며 “헌신적이고 사심 없는 분들이 이 이념과 목적을 창조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면 귀 재단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토록 따뜻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여사께서 한국 담당 부총재로 부임하신 후 한국이 역사상 유례없는 변화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특히 우리에게 보내주신 헌신적이고 사심 없는 봉사에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뒤로는 한미재단의 국내 사업이 열거되고 있는데, 주요 사업으로 거론된 것만 10여개에 달한다. 교육사업, 귀국유학생의 직업알선, 모래내 공민학교 운영, 부린기술고등학교 운영, 장학제도, 농촌개발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간척지 개간사업, 의료보건사업, 일반사회 복지사업, 주택사업 등이 그 일례다. 여기에는 한미재단이 당시 토플(TOFEL)의 공인 기관 역할을 하며 공적인 영어실력 측정을 했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다. 또 자체적으로 설립한 학교에서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들을 주로 가르쳤다는 점과 의약품·장비 지원과 공회당·극장·목욕탕 등의 공동시설 건립에 앞장섰다는 점도 눈에 띈다. 앞서의 이창호씨는 “사실상 무기와 정치, 종교만 빼고 국가 사회에 필요한 모든 사업을 재단이 책임졌다고 봐야 한다”라고 평했다.
이 중 한미재단이 특히 주력한 사업으로는 농촌개발사업이 꼽힌다. 재단은 낙후된 농촌을 부흥하기 위해 1954년 찰스 앤더슨 중령을 고문직에 앉힌 후 이른바 ‘4H사업’ 활성화로 농촌 사업에 집중했다. 4H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몸(Health) 등 네 가지의 이념을 뜻한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지덕노체(智德勞體)다. 한마디로 네 가지 이념을 배양한 전문농업인 양성에 목표를 둔 사업이다. 찰스 앤더슨 중령이 1947년 경기도 군정관으로 있던 시절 4H사업을 경기도에 국한해 우선적으로 시행했는데, 재단이 이 사업을 키운 셈이다. 앞서의 이양수씨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선 가장 원초적인 일인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컸다”며 “이에 재단은 식량 생산을 위해 세계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도 행했던 4H사업을 한국에도 끌고 와서 벌였다”라고 설명했다.
한미재단 문건에 따르면, 1964년 농림부와 주한미국경제협조처, 유엔개간사업기구, 농촌진흥청, 한미재단은 계단식 개간에 종사할 기술자를 훈련시키자는 데 합의하여 그해 2~8월 교육생들을 가르칠 419명의 한국정부 기술자와 40명의 예비사단 영농교관들을 훈련했다고 한다. 교육은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에 마련된 실습 농장에서 이뤄졌다. 한미재단은 농촌진흥청의 협조로 전국 시도 농촌진흥원에서 선발한 4H 교육생을 넘겨받아 이들을 단기·장기생으로 나눠 교육했다. 교육은 크게 교양교육과 농사교육으로 나뉘어 이뤄졌고, 여자 교육생에게는 식생활·의생활·주생활 개선 등과 관련한 교육이 추가로 이뤄졌다.
당시 재단에서 활용한 400여쪽에 달하는 훈련 교본에는 농지조성관리, 전작 관리, 원예, 가축 사양관리, 흙벽돌 건축 등의 내용이 세세하게 담겼다. 주민 삶과 밀접한 내용의 교육이 주를 이룬 셈이다. 한국4H본부에 따르면, 1960~1970년대 한미재단에서 4H 훈련을 받은 인원은 매년 200~300명가량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교육생들은 모든 교육 과정을 마친 후 가축, 곡물 이미지가 그려진 수료증을 발부받았다.
4H사업의 명맥을 현재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한국4H본부의 김병호 부장은 “4H는 미국이 강조하는 실천, 혁신 등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데 과거에는 마을 어귀마다 4H를 의미하는 지덕노체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며 “그때 양성한 인적 자원들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라고 설명했다. 한미재단 내 주요 업무를 총괄했던 임경곤(87)씨는 “교육생들이 나중에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나섰고 정부 또한 농촌 근대화 사업에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재단의 4H사업에 일찍이 관심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육영수 여사 사재 털어 재단 지원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한미재단의 농촌 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미재단의 4H 기획부장을 역임했던 다빈 이 보이드는 국내 고위급 인사들과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 1971년 9월 3일과 10일 육영수 여사와 민유동 당시 충남지사에게는 “지난 8월 17~21일 대천 해수욕장에서 개최되었던 ‘한미재단 4-h 동문회 제2차 전국 총회 및 야영대회를 위한 협조에 대해 진정한 감사를 올리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971년 9월 24일 육영수 여사에게 별도로 보낸 서신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담기도 했다. “지난 9월 16일 화요일 오후 55분 동안 여사님의 귀중한 시간을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신 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저희들은 여사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던 기회를 기꺼이 보냈습니다만 이보다도 저희들이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여사께서 농촌 실정을 이해하시고 농촌의 균차를 덜고 나아가서는 농촌 생활 향상을 위하여 도우시려고 하시는 여사님의 진정한 관심과 열망이었다고 믿습니다….” 이 서신에 따르면, 육 여사는 1971년 8월 중 재단 측에 20만원을 찬조한 데 이어 9월 16일 10만원을 추가 찬조했다. 개인적인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11월 6일 다빈 이 보이드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한 이후 11월 27일 서신을 통해 “이 기회를 빌려 금번 귀하께서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여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며 “한국 농촌 청년운동에 대한 귀하의 사심 없고 적극적인 공헌을 생각할 때 이 명예는 의당 귀하께서 받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 “농촌발전을 위한 이 운동의 큰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대한 귀하의 계속적이고 변함없는 지원 약속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같은 해 한미재단 측에 ‘농촌 청년’이라는 휘호를 내려보내기도 했다. 재단 측은 이 휘호를 소식지·동문회지 제호로 사용했다. 박 전 대통령 내외는 또한 이 소식지·동문회지 앞장에 게재할 수 있는 자신들의 사진도 추가로 내려보냈다. 이창호씨는 “청와대와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모습을 보면 비영리기관임에도 국내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라며 “여기에는 농촌 사업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관심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미재단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주요 인사록에는 당시 국회의원과 부처 장관, 검찰, 언론인, 기업인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당시 청와대뿐만 아니라 각계에서도 재단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실제 지원에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육인수(육영수 여사 친오빠)·손주창·권오태·김윤하·권성기·김충수·이영표·박명근·변우량·문태준·오준석·장동식·이재옥 국회의원, 장경순 무임소장관, 심의훈 총무처장관, 장덕진 농수산부장관, 현홍균 영남화학 서무과장, 대우출판사의 이춘구, 이재현 농어촌계발공사 사장, 황위섭 한국기독교 실업인회 총무, 김인환 농촌진흥청장, 권용식 농협중앙회장, 김종건 대전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중앙일보의 홍진기, 경향신문의 이환희 등의 이름이 각자의 주소와 함께 기재됐다.
보존 필요한 부천 소사 4H 훈련시설
이 같은 한미재단의 활동 내용과 성과는 유엔군 총사령부가 발행한 월간잡지 ‘자유의벗’에도 다수 실렸다. 자유의벗 1971년 6월호의 ‘내일의 농민들’란에는 한미재단 사업의 재원을 두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리기도 했다. ‘소사농장(4H 훈련시설)에서 하는 모든 훈련의 비용은 한미재단이 부담한다. 그 돈은 미국의 유지들이 기부한 것인데 장기 훈련을 마친 젊은이는 농장에서 일한 보수로서 3만6500원을,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업에 대한 원조로서 3만원을 받을 수 있다.’
뒤이어 소개된 재단 교육생인 충남 서산군 원북면의 김찬래군(당시 19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소사농장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에 저는 양계에 관해 얼마나 무식했던가를 깨달았습니다. 이전까지는 닭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든가 알맞게 먹이를 주고 제사의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몰랐었지요. 과거에 치던 닭의 3분의1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곧 깨달았습니다. 정말 여기서 배운 것이 많습니다. 전에는 병든 닭과 건강한 닭을 분간할 줄도 몰랐거든요.” 자유의벗에 따르면, 한미재단 측에선 김군을 비롯한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후지원 활동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재단에선 소식지·동문회지를 일정 주기로 발간했는데, 여기에는 재단 회원들의 소회가 담기기도 했다.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의 권길호씨는 1973년 농촌청년 제2집에서 “본 재단에 입소하여 계획된 시간에 짜임새 있는 교과과정을 충분하게 교육받았다”며 “그 첫째로 확고한 신념과 자신 있는 용기로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설정은 물론 단체 속에서 협동 단결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통하여 정신자세를 고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회원인 오화자씨는 1976년 제4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자라고 해서 좋은 옷 입기만 좋아하고 가사만 알뜰히 돌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면 사회의 원만한 조화와 윤택한 가정을 원하는 진정한 노력이 아닙니다. 전 항상 주위의 친구들이랑 지금 말씀드린 얘기들을 많이 하고 또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의 노력이 합치된 움직임이 미약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지금의 우리 한미재단 4-H 동문회는 힘차게 커나갈 것을 믿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한미재단 사업이 일부에게는 정신적 버팀목도 됐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이창호씨는 “경기도 부천 소사동에는 재단의 4H 훈련시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일련의 자료들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그 가치와 의미를 오래도록 기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