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2시부터 20분간 민방위 훈련이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 공습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피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은 6년 만이었는데, 곳곳에서 ‘면피성’으로 이뤄졌다. 통제를 잘 따르지 않은 시민들이 있었고, 일부 경찰·공무원들은 이들을 방치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민방위 훈련을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본지는 이날 서울 시내 유동 인구가 많은 6곳에서 민방위 훈련 상황을 점검했다. 시민 상당수는 오후 2시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도 대피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습경보가 발령됐을 때 시민들은 즉시 가까운 민방위 대피소나 지하 공간으로 대피해야 한다. 오후 2시 10분 서울 서대문역 인근 빌딩 앞에는 정장 차림의 직장인 20여 명이 실외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된 5호선 서대문역은 이 흡연 구역에서 10m가량 떨어져 있는데, 직장인들은 공습경보를 무시한 채 담배를 피웠다. 서대문역 출구에는 민방위복을 입은 공무원 6명이 서 있었지만, 거리에 있는 시민들을 대피소로 안내하지 않았다. 직장인 김모(33)씨는 “행정안전부 알림 문자도 보고 사이렌도 들었지만, 평일 대낮에 할 일도 많은데 굳이 대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많은 시민이 민방위 훈련 자체를 몰랐거나, 그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아파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에선 훈련 전부터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주민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고 가까운 민방위 대피소로 대피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오후 2시 사이렌 소리에도 아파트 단지 내 주민들은 산책을 했다. 아파트 단지 내 지하주차장 5곳이 대피소로 지정됐지만, 이날 대피소를 찾은 주민은 초등학생 1명뿐이었다. 이시우(10)군은 “어제 재난문자가 휴대전화로 와서 훈련을 한다고 알고 있었다”며 “학원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사이렌이 울려 일단 지하로 내려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아파트 경비원 박모(71)씨는 “민방위 훈련을 너무 오랜만에 하다 보니 대피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백화점, 마트 등 다중이용시설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 명동의 한 백화점에서는 “비상시 국민행동요령을 숙지해 달라” 등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대피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1층에는 손님 30여 명이 쇼핑을 즐기고 있고, 4층 음식점에선 40여 명이 식사 중이었다. 행정안전부는 그간 참여율이 저조했던 다중이용시설과 협조 체계를 구축해 직원과 고객이 실질적으로 민방위 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백화점 관계자는 “본사로부터 ‘대피 훈련 참여를 유도한다’는 정도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지침을 듣진 못했다”고 했다. 2호선 홍대입구역, 신도림역 역사에선 거리로 나가려는 시민과 이를 통제하는 민방위 훈련 관계자들 사이에 한때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훈련 중 차량 운행이 통제된 곳은 전국 216개 구간이었다. 차량 통제 구간이 시작되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선 행인들이 별다른 통제 없이 횡단보도를 자유롭게 건넜다. 일부 안전 요원들이 행인들에게 광화문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했지만 따르지 않는 시민들이 많았다. 교통 통제를 한 경찰관은 “시민들이 민방위 훈련을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전국 단위 민방위 훈련이 6년 만에 재개된 건 문재인 정부가 남북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다며 2017년 8월 이후 훈련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장은 “오랜만에 했기 때문에 민방위 훈련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이 낮아져 참여가 저조했던 것 같다”며 “수시로 하기는 어렵지만 민방위 훈련의 횟수를 늘리거나 국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할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