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 채팅하고, 인터넷으로 맛집도 찾을 줄 알아 또래 친구 중엔 제법 능숙한 편이에요. 그런데 인터넷 뱅킹은 도저히 엄두가 안 나 은행 창구에 가는 게 시간은 더 걸려도 마음이 편해요.”
서울 송파구에 사는 정이분(72)씨는 친구들과 만날 때 전화 대신 카카오톡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다. 젊은 세대가 보는 유튜브 영상도 즐긴다고 한다. 3년 전 주민센터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배웠고, 실생활에서도 수차례 연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씨는 인터넷 주문, 인터넷 뱅킹은 아직까지 해보지 못했다. 정씨는 “공인인증서부터 갖가지 인증이 필요해 너무 어려워 중도 포기했다”고 했다.
1000만명에 육박하는 65세 이상 ‘실버 세대’의 디지털 활용 능력은 최근 몇 년 새 향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상이 디지털화되면서, 노인들은 여전히 디지털 일상에서 소외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디지털 환경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된다. 미국 퓨 리서치(Pew Research)에 따르면 2019년 한국 스마트폰 보유율은 95%로 세계 1위였다. 특히 55세 이상 고령층의 모바일 스마트 기기 보유율은 2021년 기준 81.5%다. 이는 선진국 고령층과 비교해도 10~20%가량 높은 수준이다. 노인들의 디지털 기기 활용 능력도 꾸준히 향상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고령층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2018년 63.1%, 2019년 64.3%, 2020년 68.6%, 2021년 69.1%로 조금씩 높아졌다. PC·스마트폰 보급이 늘면서, 노인들은 과거에 비해 이메일, 카카오톡 활용을 수월하게 하는 편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 기간이 워낙 짧다 보니, 디지털에 익숙하지 못한 노인들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영선 경희대 노인학과 교수는 “최근 몇 년 새 노인들이 디지털 기기를 배우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며 “한국 노인들은 복지관이나 디지털 배움터에서 생존형으로 디지털 수업 들으며 배우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최문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노인들에게 디지털 사용은 마치 70~80년 동안 한국어를 쓰다 갑자기 영어를 쓰라고 강요하는 느낌에 버금간다”고 했다.
특히 통장 관리, 계좌 이체 등 은행 업무가 아날로그를 배제한 채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되면서, 자신의 돈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노년층이 많다. 현금 사용이 익숙한 노인들은 오랜 생활 습관을 바꾸기 어렵지만, 국내 금융 전체는 별다른 과도기 없이 디지털화됐다. 전문가들은 실버 세대를 위한 일종의 완충 장치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전국 지자체가 도입 중인 ‘현금 없는 버스’ 정책이 대표적이다.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IT는 선택의 폭이 늘어나는 방식이어야 하지 다른 선택지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선 안 된다”며 “현금, 카드 두 가지 모두 가능한 방향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이런 배려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일정 기간 병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상인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노인들은 경제적 격차 등에 따라 디지털 격차가 심한 편”이라며 “한국 사회는 디지털에 능숙한 노인에게 초점을 맞춰 교육 정책을 펼치기보다는, 디지털에 미숙한 노인들을 위한 지원 방안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전 교수는 “카페, 매장 등에 키오스크를 두더라도 매장 직원들이 상시 대기해 노인들을 도와주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들을 상대로 반복적인 디지털 교육이 필요하다”며 “고령층은 개인별로 디지털 격차가 크기 때문에 맞춤형으로 반복적인 교육이 진행돼야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영선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포용본부 역량개발팀장도 “스마트폰 글씨 키우는 법, 삼성페이 등 인터넷 결제하는 법, KTX 열차 표 끊는 법 등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모바일 이용 역량을 키우려면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며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디지털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 공간도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디지털 전환 속도는 사실상 조절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디지털 취약층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