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선별장에서 로봇 설비가 작업자를 눌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사고 당시 작업자가 무언가 들고 있었던 점으로 미뤄 로봇이 사람을 상자로 인식해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인다”며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지난 7일 오후 7시 45분쯤 경남 고성군 영오면 농산물 산지 유통센터 내 파프리카 선별장에서 설비 점검을 하던 40대 작업자 A씨가 로봇 팔에 끼였다. 119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A씨는 로봇 팔 끝에 달린 집게 부분과 파프리카 선별 벨트 사이에 끼여 가슴 부위가 눌려 있었다고 한다. 의식과 맥박이 없는 상태로 구조된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이 로봇은 파프리카가 크기별로 상자에 담겨 선별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가까이 오면, 이를 감지해 상자를 집어 반대쪽 팔레트(화물용 운반대)로 옮기는 기계다. 몸체는 바닥에 고정돼 있고, 로봇 팔만 왔다 갔다 하는 방식이다. 로봇 팔 끝에는 박스를 잡을 수 있도록 철제 집게가 달려 있다. 이 선별장에는 사고가 난 로봇과 같은 기계가 2대 설치돼 있다고 한다.
일본 제품인 이 로봇은 지난달 중순부터 수리에 들어갔다. 설비 관리 업체 직원인 A씨는 이날 시운전에 앞서 로봇 기계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선별장 내부 CCTV를 보면 사고 당시 A씨가 무언가를 들고 가까이 가자 로봇이 상자로 인식했는지 그의 얼굴과 상체 부위를 위에서 누르는 모습이 확인된다”며 “A씨가 로봇이 상자를 감지하는 기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경찰은 이 로봇에 사람과 박스를 구별해서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고차원적 기능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이든 집게가 작동하는 거리 안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작동하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정확한 사고 경위와 관리자나 작업자의 과실 여부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산업용 로봇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국제로봇연맹(IFR)이 올해 초 발표한 ‘2022 세계 로봇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2021년 기준 근로자 1만명당 산업용 로봇은 1000대. 근로자 10명당 로봇 1대가 배치돼 있는 셈이다. 전년(2020년) 932대에서 68대(7%) 늘었다. 지난 2011년 347대와 비교하면 10년 사이 약 3배로 증가했다.
이렇다 보니 산업용 로봇 관련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8일 오전 11시쯤 경북 예천군 예천읍 한 정미소에서 공장장 B(61)씨가 쌀 포장용 로봇 기계에 상반신이 끼여 숨졌다. 자동 포장 공정에서 쌀을 옮기는 로봇 팔이 쌀과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였다. 경찰은 정미소 대표 등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다.
앞서 지난 3월 21일 오후 6시 30분쯤 대구 달성군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는 산업용 로봇을 점검하던 20대 작업자가 로봇 팔에 짓눌려 뇌사 상태에 빠졌고, 같은 달 27일 전북 군산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도 50대 작업자가 용접 로봇을 점검하던 중 오작동으로 로봇 기계에 눌리는 사고로 숨졌다.
작년 4월 경기 평택시 진위면의 한 음료 공장에서는 30대 직원이 컨베이어 벨트와 연결된 로봇을 점검하던 중 몸이 끼여 숨졌고, 그해 7월 충남 아산시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도 40대 직원이 로봇 팔에 눌려 숨졌다. 이때도 로봇을 수리 중이었는데 누군가 실수로 작동 단추를 눌러 사고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정원지 창원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근로자가 작동하는 산업용 로봇이 많은 만큼 작업자 스스로가 안전 수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회사 측은 기계에 대한 정기 점검을 해야 한다”며 “자동화 기계는 작동 전, 기계가 예상할 수 있는 초기 상태에 가 있도록 이른바 ‘홈 포지셔닝’을 해야 갑작스러운 오작동 같은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