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지난달 29일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3년 2월 주고 받은 서신을 4일 공개했다. 이 서신은 김대중과 키신저의 인연이 시작된 배경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83년 2월 15일 영어로 ‘존경하는 헨리 키신저 박사님께’라고 적은 편지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편지에서 그동안 키신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한다.

1983년 2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 전 대통령은 “제 삶의 가장 힘든 시기에 저를 대신해서 당신이 많은 노력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 저는 지체없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며 “제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박사님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활동이 큰 영향을 주었다. 깊이 감사드리며 이는 제게 큰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고 적었다.

김 전 대통령이 편지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언급한 때는 1973년이었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망명 투쟁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한국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미국 정부 개입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뒤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때 키신저는 닉슨 미국 당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특별보좌관으로서 김 전 대통령의 구명 활동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 “저는 최근에 박사님께서 1973년 8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제가 대사관으로 망명을 원한다면 저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는 1974년 일본 언론 보도를 봤다”며 “당시에 이미 한미관계에 있어 긴장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박사님께서 이러한 조치를 주도적으로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과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80년엔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며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이다. 이 때도 키신저는 물밑에서 김대중 구명 활동에 힘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키신저는 민간인 신분이었음에도 미국 외교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김대중 구명에 힘을 보탰다.

김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 “제가 다시 체포된 1980년 5월 이후, 특히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제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박사님께서 저의 안위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하시고 저에 대해서 강력한 지지를 해주신 덕분이다”라고 적었다.


1983년 2월 24일 키신저의 답신./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며칠 뒤 키신저는 답신을 보낸다. 키신저는 겸손했다. 그는 편지에서 “당신이 저에게 사려깊은 말씀과 따뜻한 말씀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이 나라에 아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래서 당신의 생명을 구한 노력은 오직 저만의 것이 아니다. 저는 그 노력이 성공한 것이 기쁘다”고 했다.

덕분에 김 전 대통령은 1982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됨과 동시에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부터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키신저는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 시절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10여 차례 만나며 둘의 우정과 신뢰는 돈독해졌다. 키신저는 2005년 3월 4일 방한했을 당시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방문해 김 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눴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키신저 지지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미국 내에서 지지를 받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며 “이번에 공개된 편지는 김대중의 미국과의 교류 및 외교활동에 대한 중요한 증거로, 한국의 국익 증진을 위해서 노력한 김대중의 외교에 대한 자세와 능력을 보여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