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본지와 인터뷰 중인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그는 당시 "내가 이름을 알리려고 재산을 기부하는 것이라면 재산의 1%만 내놓아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DB

경남 의령군이 지역 출신 기업가이자 국내 장학사업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삼영화학그룹 관정(冠廷) 이종환 명예회장의 생가를 상시 개방한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는 꿈으로, 생전 평생 모은 재산 약 1조 7000억원을 인재 양성을 위해 쾌척한 ‘기부왕’이었다.

의령군은 이 회장의 유지가 깃든 생가를 군민과 관광객에게 알리고자 상시 개방하고 있다고 6일 밝혔다. 이 회장은 지난 9월 13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이 회장 생가는 복원 후 소유권 이전 문제 등으로 의령군과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이 분쟁에 들어가면서 한동안 개방하지 않았다. 이후 오태완 현 의령군수가 취임 후 이 회장과 만남을 통해 생가 분쟁 등이 해소됐고, 지난해 10월 의령리치리치페스티벌 개최를 기념해 3년 만에 임시개방하면서 물꼬를 텄다.

이 회장의 생가는 의령군 정동리 531번지 일원에 있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을 재현한 ‘관정헌’과 전통 기법으로 지어진 한옥 6채, 수백년된 나무와 연못 등이 어우러져 풍경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가 정원에는 이 회장이 생전 서울대에 도서관 신축 비용 600억원을 기부해 그 뜻을 기려 서울대 총장 이름으로 세워진 ‘송덕비’도 자리한다. 이밖에 “무한 추구하라. 도전 없는 성공은 없다”는 글귀를 새긴 비석, “정도의 삶을 실천하라. 정도가 결국 승리한다”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등의 생전 어록을 새긴 비석도 자리하고 있다.

의령군은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 회장의 생가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관정 이종환 회장의 생가. 의령군은 이 회장의 생가를 상시 개방한다. /의령군

의령군 관계자는 “생가 개방에 이어 의령 관문을 따라 부자 전설이 내려오는 솥바위와 이종환·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생가를 뱃길로 연결하는 관광 코스도 개발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 회장에 대한 의령군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의령읍 무전리에서 용덕면 정동리에 이르는 4km 구간을 ‘관정이종환대로’라는 명예도로명을 붙여 기리고 있다. 지난달 개최한 의령부자축제 리치리치페스티벌에서는 이 회장의 ‘나눔 인생’을 조명하는 ‘부자주제관’을 설치해 고인의 생전 업적을 알리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23년 의령에서 태어났다. 마산고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일본 메이지대학교 경상학과를 2년간 다녔다. 이후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 소련, 만주 국경과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선을 넘나들다 해방을 맞았다.

‘산업보국’의 뜻을 세워 1958년 36살의 나이에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세웠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는 생필품 중 신소재 플라스틱 제품에 눈을 돌렸다. 회사는 현재 삼영중공업 등 10여개의 회사를 거느리는 삼영그룹으로 발전했다. 상품 포장재 생산은 국내 1위, 전자제품의 핵심 소재인 캐퍼시터 필름은 세계 3대 메이커로 키워냈다.

이종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이 지난 2015년 2월 5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관정관 준공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이 회장은 솔선과 근검을 앞세워 필요없는 곳에 경비를 아끼면서도, 인재 양성에는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털었다. ‘기부왕’ ‘장학사업가’로 그가 더 유명한 이유다. 이 회장은 2002년 4월 대한민국 인류 발전을 위한 1등 인재 육성을 목표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재단에 지금까지 쾌척한 재산만 1조 7000억원에 달한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정도(正道)’에서 장학사업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사회 환원의 결단이 서자 재산을 정리해서 재단에 넣는 절차를 숨가쁘게 밟아나갔다. 한 건씩 넣을 때마다 내 재산은 줄어들었지만 내 마음은 더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 할지 모른다. 그것은 베풂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생은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손을 채운 다음 갈 때는 빈손으로 가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나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이종환 회장. /조선DB

이 회장이 교육재단을 설립하면서 꿈꿨던 바는 이공계열에서 한국이 노벨상 수상국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합성수지(플라스틱) 생필품과 비닐 포장재 제조업으로 돈을 벌고, 전선을 만들면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다고 한다. 스위스처럼 작은 나라도 과학과 기술이 뛰어나니 잘사는 모습을 보고, 인재만 잘 키우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노벨상 수상을 선진국 증표로 여겼다고 한다. 이 회장이 임종 직전 남긴 말은 “관정 장학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걸 보지 못하고 가게 돼 아쉽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의 뜻대로 재단은 해마다 국내외 장학생 1000명에게 15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아시아 최대 장학재단으로 컸다. 23년간 장학생 수는 1만2000여명에 이르고, 박사학위 수여자가 750명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급한 장학금액만 2700억원에 이른다. 지난 2012년에는 600억원을 기부해 서울대에 총 면적 2만5834㎡ 규모의 관정도서관을 지어줬다. 중국 5대 명문 저쟝(浙江)대학에도 관정 장학생 50명을 지원했다.

이 전 회장은 사회 기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훈했고, 2021년 4·19문화상을 수상했다. 서울대는 2014년 국내 화학산업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공적을 기리고자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이 지난 7월 14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 조병두홀에서 장학금을 전달했다. /관정이종환교육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