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지난 10월 필리핀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 총책을 붙잡아 국내로 강제송환했을 당시 모습. 이들은 4년간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피해자들을 유인, 총 108억 원을 가로채 빼앗은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민준파 총책 A씨 등 필리핀으로 도피한 일당에 대해 2020년 9월 인터폴 적색수배를 발부받아 필리핀 경찰과 공조 수사를 벌여왔고, 2년여 간의 추적 끝에 지난 9월 필리핀에서 검거했다./경찰청

경찰청은 국내에서 유명 작가로 행세하며 수천만원의 사기를 저지른 뒤 필리핀으로 도피한 윤모씨를 지난 8월 강제 송환한 것으로 8일 파악됐다. 윤씨 송환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가 필리핀 교도소 수감 중인 한국 범죄자들에게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한 ‘꼼수’ 수법을 최초로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윤씨가 퍼뜨린 수법은 간단했다. 필리핀 현지에서 추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필리핀 현지에서 죄를 지어 형(刑)을 선고받게 되면, 그만큼 국내 송환 절차가 지연된다는 점을 노리는 셈이다.

윤씨는 필리핀 교도소 내에서 “한국으로 송환돼 수십 년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필리핀 교도소에 있는 게 낫다”는 취지로 필리핀 교도소 내 한국인 흉악 범죄자들에게 이른바 컨설팅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필리핀 교도소 수감 중에 이런 수법을 공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씨로 인해 필리핀으로 도피한 범죄자 중 상당수가 국내 강제 송환을 피할 목적으로 필리핀 현지에서 추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 당국에 따르면 필리핀 현지 교도소엔 한국인 80~90 명이 수감 중이다. 이 중 절반이 넘는 50여 명이 국내 송환을 피하기 위해 현지에서 사건을 일부러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 교도소 수감자 상당수가 현지에서 붙잡힌 뒤 한국 송환을 앞두고 조력자에게 본인을 다른 사건의 피고소인으로 신고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발견돼 필리핀 수사 당국과 공조하고 있다”고 했다.

보이스 피싱범인 일명 ‘김미영 팀장’ 박모(52)씨가 윤씨로부터 전수받은 수법으로 송환을 회피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박씨 일당은 지난 2012년 ‘김미영 팀장입니다’로 시작하는 대출 상담 문자를 보낸 뒤 이에 반응한 사람들에게서 수백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지난 2013년 이 조직의 국내 조직원 28명을 검거했지만, 총책 박씨와 주요 간부들은 필리핀 등으로 도피했다. 박씨는 지난 2021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검거됐지만, 2년 넘게 국내 송환 절차는 지연되고 있다. 박씨가 검거 직후 필리핀 경찰에 “내가 현지서 사기 등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충남 서산에서 아내를 살해한 뒤 태안의 한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는 강모(38)씨도 마찬가지다. 강씨는 범행 이틀 만에 필리핀으로 도피했다가 지난 2월 필리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검거 직후 필리핀 이민국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가 8일 만에 검거됐는데, 당시 강씨가 시가 2억3000만원 상당의 마약류 1㎏을 소지한 채 붙잡혔다. 필리핀 경찰은 강씨를 불법 약물 등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법상 외국인이 마약 거래를 하면 종신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국내 송환은 사실상 어려워진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경찰은 필리핀 현지 경찰과의 공조로 범인을 붙잡을 때 최대한 빠르게 송환을 추진하고 있다.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범죄자가 추가 사건을 일으켜 송환이 연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범죄자들은 자해를 시도하며 송환을 거부하기도 한다. 경찰청은 지난달 필리핀 이민청에 수감 중이던 전화금융사기 조직 총책을 국내로 송환했다. 총책은 2016년 6월부터 2017년 4월까지 필리핀 바기오를 거점으로 전화금융사기 범죄단체를 조직한 후 검찰·금융기관을 사칭해 91명에게서 11억4207만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필리핀 당국으로부터 강제추방 승인 결정을 통보받고 호송관 2명을 파견해 송환을 추진했다. 그러자 총책은 현지에서 자해 난동을 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