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수험시험 한국사 인기 강사 황현필씨가 ‘이승만의 25가지 과오’라는 영상을 자기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황씨는 인플루언서다. 황씨 유튜브는 구독자가 96만1000명이고 이 영상은 48만명이 시청했다. 황씨는 영화 ‘건국전쟁’이 인기를 끌자 “숨어 있었던 미친 놈들이 확실하게 스스로 미친 놈임을 드러내고 있어서 재미있다”며 “상식적인 역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고 자기 페이스북에 써놨다.
역사는 누가 즐기거나 보여주는 장식품이 아니다. 팩트, 사실이라야 한다. 더럽고 치사해도 사실이라면 그게 역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 신화를 벗긴다’라는 자료집, 그리고 이 단체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영화 주장도 황씨 주장과 대개 일치한다. 황씨는 스스로를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강의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황씨가 ‘역사답지 않다고’ 주장한 ‘이승만의 25가지 과오’를 중심으로 검증해본다.
[황씨 주장1] 이승만은 돈에 혈안이 되어 살았다.
①황씨 주장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돈을 쫓았습니다. 이건 내가 한 말 아닙니다. 미국 CIA 기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정확하게 뭐라고 이야기 했냐면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미국 CIA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②분석: CIA 문서에는 ‘이승만은 애국자’
우선 CIA 기밀문서라고 제시한 ‘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문서는 1948년 10월 28일 생산된 18페이지짜리 문서다.(미 CIA, ‘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1948년 10월 28일) 이미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작성됐다.
황씨가 인용한 대목을 보자.
‘Rhee has devoted his life to the cause of an independent Korea with the ultimate object of personally controlling that country.’
‘이승만은 자기가 한국을 통치하리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평생을 한국 독립이라는 대의에 평생을 바쳤다’라는 뜻이다.
이게 어떻게 ‘돈에 혈안이 되어 살았다’는 첫번째 과오에 대한 증거인가. 정치인의 궁극적 목표는 권력 쟁취다.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독립한 나라에서 권력을 얻겠다는 목표가 과오인가? 여기에 돈 벌려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황씨가 한 더 황당한 행위는 조작이다. 이 문장 바로 위에 이런 문장이 있다.
‘Rhee Syngman is a genuine patriot acting in what he regards as the best interests of an independent Korea. He tends, however, to regard the best interests of Korea as synonymous with his own. It is as if he, in his own mind at least, were Korea.’
직역해보자. ‘이승만은 독립 한국의 최고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행동으로 옮기는 진정한 애국자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이익이 곧 자기 이익과 동일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치 본인이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미국 정보기관이 분석했다. 황씨는 이걸 왜 빼먹었나? 황씨가 인용한 문장 뒤에는 CIA가 파악한 부정적인 판단들도 나온다. 그리고 CIA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Yet Rhee, in the final analysis, has proved himself to be a remarkably astute politician.’
‘그럼에도 이승만은 놀랄 만큼 통찰력 있는 정치인임을 스스로 입증했다는 게 최종 분석 결과다.’
진짜 애국자고, 놀랄 정도로 통찰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다. 이게 무슨 이승만이 돈에 혈안이 됐다는 증거인가.
게다가 이 보고서는 미 군정이 1945년부터 3년 동안 관찰한 한국 보고서다. 미군정을 사정없이 괴롭히며 한국에 필요한 걸 다 얻어내려 한 노련한 정치인에 관한 보고서다. 군정 이전 이승만이 한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여기에 없다.
③진실: 1센트도 가져간 적 없는 이승만
황씨는 이어 돈에 혈안이 됐다는 증거로 자료화면을 제시했다. ‘하와이 동포 로버타 장씨가 밝힌 이승만 행적’이라며 동포 모금액으로 부동산을 사고 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상환을 동포에게 넘기고 동포회 부동산을 단 1달러에 사고 기타 등등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은 뒤 상환책임을 동포회에 넘겼다고 주장한다.
자료 화면이라면 자료를 대야 마땅하다. 저 영상에 띄워놓은 글자들은 자료가 아니라 주장이다. 부동산 거래 내역이 있는 1차 기록을 대야 한다. 황씨 같은 인플루언서가 던지는 감성적인 주장은 일반 대중에게 또한 감성적으로 수용되고,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팩트인 것처럼 신뢰받는다. 그래서 가짜뉴스, 가짜 역사가 진짜 역사로 둔갑해버린다.
하와이 교포인 이덕희씨가 쓴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 2015)이라는 연구서가 있다. 이 책 p206부터 p322까지 거의 120페이지에 걸쳐 그 이승만의 돈에 관한 분석이 실려 있다. 이씨가 하와이주 토지-자연자재국 부동산 기록실 등기부를 샅살히 뒤져서 만든 보고서다. 여기에는 이승만이 1914년 한인 모금 2400달러로 한인중앙학교 여학생기숙사를 구입하고 이후 ‘국민회’라는 단체로부터 매입이 아니라 기부를 받고 한인여학교, 한인중앙학교, 한인기독학교로 교육기관을 성장시키고 마침내 1950년 이 모두를 매각해 13만8500달러라는 수익을 한인 교포사회에 남기게 된 기록이 나와 있다. ‘국민회’로부터 받은 부동산으로 또 대출을 받아 상환을 떠넘긴 기록은 등기부 어디에 봐도 없다.
또 대출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고 황씨는 영상에서 주장했다. 본인만 모른다. 명확하게 사용처가 나와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은행에 예치됐던 13만8500달러는 1962년 11월 17일 이 기금관리위원 최백렬 선생이 방한해 한국상업은행에 입금했다. 이자까지 합쳐서 17만9353달러4센트. 당시 돈 2331만5895원이다. 이 돈으로 설립한 학교가 인천에 있는 인하대학교다.(이덕희, 앞 책, p127)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이승만은 돈에 혈안이 돼서 살지 않았다. 황씨 주장은 단 한 글자도 사실과 맞지 않는 가짜역사다. 아래는 당시 이승만이 살았던 하와이 집이다.
[황씨 주장2] 이승만은 장인환과 전명운의 변호를 거부했으니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①황씨 주장
“미국인 스티븐스를 미국에 있었던 장인환과 전명훈이 죽입니다. 한인들이 변호 비용을 십시일반 해 가지고 이승만에게 가지고 갑니다. 근데 이승만이 너무나 큰 돈을 요구합니다. 그 큰 돈을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나는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변호를 거부합니다. 한인들이 큰 비용을 만들어 대면서까지 부탁을 했을 때 그걸 거절했다면 독립운동가로서 분명히 비판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②분석: 거액 요구한 적 없는 통역
더럼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친 친일 미국인이다. 1908년 3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교포 장인환과 전명운에 의해 암살됐다. 스티븐스에 대한 항의 및 대책은 샌프란시스코 양대 한인단체인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가 기획했다. 황씨는 두 단체가 그 ‘변호’를 영어에 능통한 이승만에게 맡겼는데 살인자 운운하면서 거부했으므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중에게는 변호 거부로 인해 이승만이 두고두고 한인사회의 비난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일단 한인들이 맡긴 역할은 ‘변호’가 아니라 ‘통역’이다. 이승만은 미국 변호사 자격증이 없었다. 변호와 통역은 역할 자체가 다르다. 황씨는 마치 이승만이 동포 변론을 거부한 악인인 것처럼 표현했다.
또 ‘이승만이 너무나 큰 돈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그 어떤 문서에도 금전을 이승만에게 줬거나 이승만이 요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미주 독립운동가 김원규의 ‘재미한인50년사’(1950)에도 금전 요구나 수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손보기 역, 혜안, 2004, p244) 왜 ‘심지어’인지는 끝에 나온다.
따라서 황씨 주장은 앞 항목과 마찬가지로 ‘돈에 혈안이 된 이승만’으로 조작한 날조다.
③진실1: 대리 통역 신흥우는 이승만의 옥중 동지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재판이 진행되던 7월 이승만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한 뒤 7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었다. 통역을 거부한 이승만은 8월 12일 한인 신문 ‘공립신보’에 글을 기고했다. ‘그 충애지심이 도리어 한국의 장래에 손해할 염려가 없지 않으리로다.’(1908년 8월 12일 ‘공립신보’) 실력 양성과 외교적인 경로를 통한 독립이라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이승만은 통역을 거부한 것이다. 미-일 사이가 밀월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외교 투쟁을 택한 이승만에게 이 재판 간여는 쉽지 않았다. 이승만이 석사 과정에 있던 그해 3월 뉴욕타임스에는 ‘잔인한 민족, 한국인-스티븐씨 암살 사건은 돌출 사건이 아니다(Koreans Bloody Race-Attempted Assassination of Mr. Stevens Not an Isolated Case)’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1908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 이승만에 따르면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나의 역사학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던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여름방학에 피서지로]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고 했다.(’청년 이승만 자서전’, 1912)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이승만이 거부한 통역을 로스엔젤레스 ‘유학생 신흥우’에게 맡겼다. 자, ‘유학생 신흥우’라고 표현하면 ‘거물 이승만’과 대비되는 평범한 학생으로 들린다. 아니다. 신흥우는 무명인물이 아니라 이승만의 옥중 동지다.
신흥우는 이승만과 배재학당 동문이다. 또 1899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다른 사건으로 함께 수감돼 옥중 학교를 같이 이끌었던 인물이다.(전택부, ‘인간 신흥우’, 기독교서회, 1971, pp.60~62) 그러니까 이승만이 동부로 돌아가며 로스엔젤레스에 들렀는데(손세일, ‘이승만과 김구’21, 월간조선 2003년 4월호, p565) 이때 신뢰하는 동지 신흥우에게 통역을 부탁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류석춘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이 발굴한 ‘송철 회고록: 미주이민사와 동지회의 생생한 증언’(이상수 역, Keys Ad & printing Co., 1985)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승만과 동지였던 송철에 따르면 이승만은 ‘옥중 동지였던 신흥우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신흥우는 흔쾌히 요청을 들어주었다.’(앞 책, pp.224, 225) 신흥우는 ‘우리 사정을 아는 서던퍼시픽 철도회사 배려로 무료 티켓으로 LA와 샌프란시스코를 왕래하며’ 통역을 했다.(전택부, 앞 책, p69)
④진실2: 교민들이 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
1910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이승만의 저작 ‘독립정신’이 출판됐다. 이승만이 한성감옥 수감중인 1904년에 옥중집필한 책이다. 1907년 로스엔젤레스에 설립된 ‘대동신서관’에서 출간했다. 출간일은 1910년 2월이다. 이 출판사를 설립한 주체는 ‘대동보국회’다. 바로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주도한 그 단체다.
이 책은 2019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과 우남 이승만전집 발간위원회가 영인본으로도 발간했다. 책장을 넘기면 첫 페이지에 이승만 사진이 나오고 이승만이 쓴 서문이 나온다. 이어서 훗날 외교투쟁노선과 무장투쟁노선을 두고 갈등을 빚는 박용만의 서문, 그 다음에 박용만과 전명운 재판 통역을 맡은 신흥우 사진이 나온다. 또 다른 서문은 문양목이 썼다. ‘대동보국회’ 회장 문양목이다.
1908년 8월 이승만이 통역을 거부하고 1년 6개월 만에, 통역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세력이, 그 통역을 거부한 이승만의 책을 출간했다. 통역을 맡았던 ‘유학생’ 신흥우 사진이 두번째로 들어가고, 스티븐스 사건 전체를 주도한 대동보국회 회장 문양목이 서문을 썼다.
이게 통역을 거부해서 비난을 받은 사람에게 할 대접일까.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 너그러워서일까. 결론은 이승만이 통역을 거부한 사실이 당시 비난받을 정도로 부도덕하거나 대의명분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승만은 자기 전략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포를 도왔고, 이는 당시 한인사회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스티븐스 사건 통역 거부에 얽힌 진실이다.
⑤진실2: 황씨는 무엇을 봤나
그런데 황씨는 ‘이승만은 “장인환과 전명운, 안중근은 국가 명예를 실추시킨 암살범”이라고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자료화면에 제시된 출처를 보면 ‘The Writings of Henry Cu Killl’(edited by Dae-Sook Suh)라고 적혀 있다.
이건 황씨가 이 자료를 읽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맞는 제목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이다. Killl이 아니라 Kim이다. pdf 화면을 잘못 복사하면 이렇게 오타가 나온다. 이 책은 헨리 쿠 킴이라는 사람이 쓰고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가 편집한 자서전이다. 이 책 186페이지에 황씨가 인용한 저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책을 편집한 서대숙 교수 서문에는 이런 경고가 반복해서 나온다.
‘이승만은 저자의 적(敵:adversary)이기 때문에 이승만에 관한 서술은 극도로 왜곡돼 있다(extremely biased)’.(헨리 킴, 서대숙 서문, p13)
저자 헨리 쿠 킴은 한국명이 김현구다. 이승만과 금전 및 조직 문제로 하와이에서 완전히 원수가 된 인물이다. 따라서 인용을 위해서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승만에 관한 내용이 악의에 가득 차 있다. 황씨는 같은 내용이 소개돼 있는 위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집만 봤을 뿐,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황씨가 ‘이승만은 하와이 갱스터였다’라고 주장한 부분도 바로 이 책에 나온다. 저자 김현구는 ‘이승만이 (이탈리아 갱 마피아로 유명한)알카포네를 존경했다’고 주장했다.(헨리 킴, p217) 역시 이승만과 적대관계에 있던 김원용의 ‘재미한인50년사’도 마찬가지다. 이승만에 대해 악의적 프레임을 가진 독자가 보면 ‘역사답게’ 기록한 책들이다. 제대로 된 공부 없이 자기 입맛에 맞게 주장한다고 역사가 역사다워지나. 대중을 기만하는 허황된 대자보일 뿐이다.
[황씨 주장3] 이승만은 식민 지배를 찬양한 친일파다
①황씨 주장
“이승만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신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근대화됐다라고 인터뷰한 기사가 완벽하게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독립운동가로서 자격 미달이죠.”
②분석: 대꾸할 가치가 없는 아마추어 주장
일단 황씨가 제시한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를 본인이 찾아서 읽어봤는지 궁금하다. 아니, 궁금하지 않다. 안 읽어본 게 틀림없으니까. 남이 악의적으로 취사선택한 사료를 엄밀한 검증없이 인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원문을 보자. 제목은 ‘변모하는 조선(Korea Being Transformed)’이다.
‘”The old-time ‘Hermit Kingdom’ is no more,” declared Dr. Syngman Rhee, a native of Korea, who is a YMCA visitor here. “Within the space of three years Korea has been transformed from a slow-going country, where tradition reigned, into a live, bustling center of industrialism,” said Dr. Rhee at the Willard.’
“그 옛날 은자의 나라 조선은 더 이상 없다.” 이곳 (워싱턴DC) YMCA를 찾은 이승만 박사가 말했다. 이 박사는 윌라드에서 “대략 3년만에 조선은 전통이 지배하던 정체된 국가에서 활기차고 번화한 산업 중심지로 변모했다”라고 말했다.
기사가 게재된 날짜는 1912년 11월 18일이다. 아무 맥락 없이 읽으면 조선이 식민지가 된 1910년 이후 3년 만에 산업국가로 성장했다고 들린다. 그래서 황씨는 이를 인용해 식민지로 추락한 뒤 조선이 성장했다고 말한 이승만은 친일파라고 주장했다.
역사 공부 기본은 교차검증이다. 한 사료 내에서도 맥락을 봐야하고 다른 사료를 통해 사실관계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 신문에 실린 이승만 발언의 핵심은 ‘서울YMCA가 신회관 신축(1908) 후 본격 가동된 3년’이다. ‘식민지화 3년’이 아니다. 한일병합은 1910년 8월 29일이며 이승만 인터뷰 기사는 2년 3개월 뒤에 실렸다. 참고로 이승만 유학을 주선한 제임스 게일 목사가 1909년에 쓴 책 제목은 ‘Korea in Transition(전환기의 조선)’이었다.
이날 이승만은 YMCA 사회복지 직업학교 방문학생 자격으로 기자와 인터뷰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서울YMCA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이 YMCA 본부에서 YMCA가 조선에서 3년간 이룬 치적을 말한 것이다. 황씨는 이 맥락을 전혀 보지 않고(혹은 못하고) ‘한일병합 3년을 찬양한 친일파’로 덮어씌우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실 검증보다 진영 논리가 앞선 미숙한 판단이다.
③진실1: 친일이 아니라 ‘친YMCA’ 발언
1912년 YMCA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105인회사건’이 터지면서 이승만은 미국으로 다시 떠났다. 1912년 3월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이후 미국 전역에서 동포들을 만나고 10월 워싱턴DC에 도착했다. 이때 목적은 YMCA 사회복지 직업학교 방문학생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위 기사를 게재하고 보름 뒤 포화탄(Powhatan) 호텔에서 다시 인터뷰를 가졌다. ‘조선, 동방을 기독교화하다(Korea Christianizing the East)’라는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워싱턴 YMCA 사회복지학교 학생으로 워싱턴에 왔고, 훗날 조선 YMCA 학생총무로 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912년 12월 2일 ‘워싱턴포스트’)
11월 20일 YMCA 이사장 S.W.우드워드(Woodward)는 자기 집에서 이승만과 조선 YMCA 협동총무 브로크먼을 맞는 환영식을 가졌다.(1912년 11월 21일 ‘워싱턴포스트’) YMCA는 그해 10월 한국을 포함한 세계 순회 선교사 파송 사업을 개시했다.(1912년 10월 8일 ‘워싱턴포스트’)
이런 상황에서 11월 18일 이승만 발언이 보도된 것이다. 황씨가 제시하지 않은 다른 부분을 읽어본다.
‘In all this work of transition the YMCA has had a most important part. Take our building at Seoul for instance—a building, by the way, which was put up by an American, John Wanamaker.’
‘이 모든 변화에 YMCA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서울에 있는 우리 건물만 봐도 그렇다. 이 건물은 미국인 존 워너메이커가 지어준 건물이다.’
‘The strides which Christianity is making in the old ‘Hermit Kingdom’ are nothing short of marvelous. Introduced only 27 years ago, Christianity now has no fewer than 325,000 adherents, and the converts increase daily.’
‘오래된 은자의 나라에서 기독교가 이루고 있는 행보는 경이롭다. 불과 27년 전에야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된 나라가 신자 32만5000명이고 하루가 다르게 개종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기사 전문 어디에도 ‘일본’이라는 단어는 없고, 모든 주체는 기독교나 YMCA다. 이승만 발언이 문어체인 사실로 미뤄볼 때, 이승만은 11월 20일 환영식 때 할 연설문을 윌라드호텔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며 미리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드워드 저택 환영식에는 YMCA 인사 6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하루24시간클럽(24-hour-a-Day Club)’ 회원들이었는데, 이 클럽은 이승만과 동행해 미국으로 온 조선YMCA 협동총무 브로크먼 후원자들이었다.(1912년 12월 2일 ‘워싱턴 포스트’)
이게 친일 발언인가? 기독교 도움으로 프린스턴 박사 학위를 따고 조국에서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실질적으로 망명한 인물이 기독교인들에게 할 감사인사다. 왜 황씨는 맥락을 보지 않고 문장 한 줄 딱 끄집어내서 의미를 조작해 멀쩡한 사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가. 이래야 역사다운 역사로 둔갑하는가.
④진실2: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를 고발했다고?
게다가 이승만의 친일행각이라며 황씨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법원에 고발했다고 주장했다. 호놀룰루에 일본 군함이 도착하면 박용만이 파괴할 음모를 꾸몄으니 이들을 조처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군함 폭파에 대해 이승만이 정식으로 고발한 사실이 없다. 이는 하와이에서 금전 분쟁으로 법정소송까지 갔을 때 나온 한 말이다. 법원에서는 이 발언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박용만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해외로 반출해 출판을 가능하게 해준 옥중 동지다. ‘독립정신’ 앞쪽에 박용만 사진도 실려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비폭력외교노선과 무장투쟁노선으로 서로 다른 노선을 가면서 갈등을 빚는다. 하와이에서 두 세력은 금전 문제까지 겹치며 폭력과 맞고소 사태를 이루는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
1918년 6월 숱한 법정 다툼 가운데 한 소송에서 법원에 출석한 이승만이 1914년 이즈모 군함 공격 이야기를 언급했다.(방선주, ‘재미한인 독립운동’, 한림대출판부, 1989, pp.103,104) ‘이승만은 ‘소위 군단 사람이 일본 군함을 폭발탄으로 치고져 하얐다. 다만 이것이 농담이라 하얏으니.’(1918년 6월 28일 ‘신한민보’) 금전과 폭력 고소사건에서 나온 법정진술이며 이는 맞고소 상대방끼리 폭력사태가 난무한 가운데 튀어나온 과격 발언이다. 당시 파벌싸움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원순이 ‘아무 불평 없이 화목하게 살고 있는 하와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심했다.(이원순, ‘세기를 넘어서’, 신태양사, 1989, p129)
이게 ‘독립운동가 고발’인가. 당시 교민사회에서도 이승만 발언에 대해 비난이 비등했지만 이를 황씨처럼 정색을 하고 독립운동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친박용만파인 김현구는 ‘1917년 박용만이 ‘태평양시사(Taepyongyang sisa:김현구는 영문명을 ‘Pacific Review’라고 표기했는데 원래는 ‘The Korean Pacific Times’다)에 이즈모를 공격해야 한다는 논설을 쓰자 이승만이 군당국에 제보해 박용만이 조사받았다’고 기록했다.(김현구,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pp.272,273) 하지만 박용만이 ‘태평양시사’를 창간한 날짜는 이즈모 기항이나 이승만 법정 발언 시기보다 한참 늦은 1918년 11월 28일이다.
공무원 시험 강사 황현필씨를 비롯해 이승만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진영은 반이승만세력 기록을 아무런 검증 없이 인용한다.
여기까지 인플루언서 공무원 수험 역사 강사 황현필씨 영상을 계기로 이승만에 얽힌 가짜뉴스 세가지를 살펴봤다. 다음편에는 이승만이 20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기소당했다는 형편없는 가짜뉴스를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