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수험시험 한국사 인기 강사 황현필씨가 주장한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두번째 검증이다. 황씨는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가운데 6번째로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방탕하게 살았다’고 주장했다. ‘돈에 혈안이 된 이승만’과 함께 이승만의 도덕성에 중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주장이다. 보자. 먼저 ‘이승만이 20대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황씨 영상 녹취다.
황씨: 이승만은 기소당한 플레이보이
“여러분, 대통령 명함 파고 다니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엄청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엄청난 식사를 해댔으며 백인 여성들까지 이렇게 꼬드겨가면서 자유로운 연애를 했고 40대가 넘은 나이에 22살 여인과 끌고 다니다가 사랑행각을 하다가 주와 주를 이주하다 보니까 미국 경찰에게 걸린단 말이죠. 그래서 재벌 행세를 하다가 미국 수사관들에 의해 플레이보이로 기소됩니다. 임시정부 대통령이 플레이보이로 기소가 됐고 여러분, 저게 임정에 알려지면 이승만의 정치생활, 독립운동가로서의 생명은 끝나죠. 그래서 미국에서 재판받기를 거부하고 하와이까지 건너와서 하와이에서 미리 알고 있던 백인 주류들을 어찌저찌 꼬드겨 삶아서 절대 이승만이 그럴리 없다, 그러나 분명히 기소됐고 실제로 이거는 역사적 팩트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정말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승만은 하고 있었습니다.”
황씨는 이런 주장과 함께 배경화면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다.
‘맨 법률 위반.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여자를 데리고 주경계선을 넘으면 불법이다. 수사 도중 이승만이 백인 여성에게 접근 재벌2세를 사칭 데이트. 기소. 이후 하와이에서 재판.’ “우리는 아빠와 딸 같은 관계입니다.”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수사관에 체포. 이승만(46세), 노디김(22세)’
100% 거짓말
묻겠다. 황씨는 본인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있는가. 이승만이 ‘백인 여성들을 꼬드기고’ ‘20대 여인과 사랑행각을 벌이며 재벌 행사를 하다가 체포됐고’ ‘수사 도중에 백인 여성에게 접근해 재벌2세를 사칭 데이트를 했고’ ‘미국에서 재판 받기를 거부하고 하와이에 가서 백인주류를 꼬드겨 삶고’ ‘그러나 분명히 플레이보이로 기소됐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가. 하나 더. 황씨가 화면에 띄운 사진이 황씨가 이승만이 사랑행각을 했다고 주장하는 여인 맞나?
황씨 주장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다. 황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이승만이라는 인격을 모독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쓰레기로 만들었다. 맞다면 황씨는 반드시 책임지고 사실이라고 입증해야 한다. 1920년 6월 당시로 가보자.
은밀한 제보
1920년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 헬레나, 덴버, 로스앤젤레스, 엘파소 등 미국 서부지역 이민국은 시카고 이민국으로부터 제보 문서를 받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맨액트(Mann Act)’를 위반한 한국인 2명이 미국 전역을 여행 중이라는 비밀정보를 입수함. 이들은 6월 16일 시카고에 있었으나 한국 클럽에서 정체가 드러나자 급히 떠남. 이들은 이 가운데 젊은 여자 엄마가 산다는 하와이로 가는 중으로 추정됨.’(미노동부 이민국 문서 2003/663)
맨액트는 당시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주 경계를 넘어 여행하면 처벌하는 규정이다. 문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들은 ‘싱먼 리(SYNGMAN RHEE)’, 혹은 ‘이승만(E.SUNG MUN)’과 미스 ‘노디 도라 킴(NODIE DORA KIM)’임. 리 박사는 자금을 모으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한국 정부를 세우기 위해 한국인의 외교 대표로 입국했다고 함. 나이는 40~45세. 키는 보통. 다부진 체격에 심한 곰보자국. 얼굴에 경련이 생기는 신경계 증상도 약간 있음.(중략) 리 박사는 아내와 이혼했다고 주장하지만 제보자에 따르면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함. 리박사는 최고급 호텔에 기거하며 아낌없이 돈을 쓰는데 특히 미국 여자들에게 돈을 쓴다고 함. 노디김, 22세. 미인형에 매우 말랐음. 오하이오주 오벌린의 오벌린 대학 재학생. YMCA, YWCA, 감리교회와 같은 기관 모임에서 강연.’
(유부남인) 이승만과 (미혼인) 노디김이라는 남녀가 맨액트를 어겼다는 제보를 받았으니 해당 지역 이민국이 조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시카고 이민국 랜디스 조사관은 ‘이 두 사람에게 처분이 개시되면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1920년 6월 이승만
그때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은 하와이로 가기 위해 서부로 여행 중이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로 갈 예정이었다. 임정에서 이승만 신분은 대통령이었고, 상해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세계 각지 한인 조직에 의해 국무경, 집정관 총재 등으로 추대됐고, 상해 임시정부로 이들이 통합되면서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이어 대통령에 임명됐다. 외교투쟁 활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임정 방문은 처음이었다.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난 이승만 일행은 14일 클리블랜드에서 노디김, 김신실, 주영순 3명과 함께 시카고로 떠났다. 시카고에서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이승만은 하루를 묵었다.(‘이승만일기’ 1920년 6월 12일) 하와이 출신인 노디김은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중앙학원을 졸업했다. 역시 하와이 출신인 김신실, 주영순과 함께 이승만 추천으로 오벌린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이승만 기록과 노디김의 기억은 다르다. 이민국이 노디김을 조사한 문서에 따르면 노디김은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행 기차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증언했다.(1920년 8월 25일 하와이 이민국 파일4377) 이런 기억 차이가 훗날 이승만과 노디김의 불륜을 주장하는 꼬투리가 됐다.
6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19일 새크라멘토에서 교포들을 만나고 다음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다음날 저녁 한인교회 모임에 참석한 뒤 이승만은 22일 여객선 마노아(Manoa)호를 타고 하와이로 떠났다. 배는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이승만일기’, 1920년 7월 15일 ‘신한민보’) 그리고 이승만은 상해 임정과 전보를 주고받으며 상해로 갈 계획을 짰다.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엔젤레스에서 상해행 배를 타면 일본 항구에 기항하기 때문에 위험했다. 5개월 뒤인 11월 16일 이승만은 비서 임병직과 함께 네덜란드 국적 화물선 웨스트 히카(West Hika)호에 밀항해 상해로 떠났다. 배편은 이승만 동지인 보드윅이 알선해줬다. 이승만과 비서 임병직은 열려 있는 지하 철문 속에 들어가 출발했다.(임병직, ‘임병직회고록’, 여원사, 1964, pp.140, 161~163)
두 달만에 개시된 조사
그 사이에 시카고 이민국에 이승만이 맨액트를 위반하고 젊은 여자와 여행했다는 제보가 들어간 것이다. 첫 제보가 있고 약 두 달 뒤 시카고 이민국에 또 다른 제보가 들어갔다. 8월 2일 시카고 이민국이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전문을 보냈다. ‘두 사람이 하와이 도착함.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L.S.강이라는 사람이 정황을 다 알고 있다고 함. 미스 거더펠(Guthapfel)이 강에게 조사원을 보냈음. 거더펠은 본인 신분을 최대한 숨겨달라고 함.’(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 2003/663)
이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거더펠이라는 여자는 이승만과 노디김이 하와이에 도착했고 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강’이라는 사람도 이민국에 소개해줬다. 이민국은 두 사람의 행방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일주일 뒤인 8월 9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이 이 ‘강’이라는 사람을 방문했지만 외출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바로 이날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은 하와이 이민국에 공문을 보내 조사를 요청했다. 내용은 처음 6월 22일 시카고 이민국이 보낸 문서와 동일한데 두 군데가 다르다.(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 12023/01)
먼저, ‘리박사는 최고급 호텔에 기거하며 아낌없이 돈을 쓰는데 특히 미국 여자들에게 돈을 쓴다고 함’이라는 내용이 사라졌다.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자체 조사과정에서 이 내용을 삭제했다. 두번째, ‘제보가 사실이면 미국 본토 입국을 불허하고 국외 추방 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는 이민국장의 권한 이임 문장이 끝에 삽입돼 있다.
조사 받는 젊은 여자 노디김
하와이 이민국은 이 문서를 토대로 8월 25일 노디김을 조사했다. 조사관 핼시(Halsey)는 노디김에게 위 문장이 없는 문서를 보여주며 조사를 시작했다.
진술에 따르면 노디김은 ‘YMCA강연을 마치고 하와이로 가기 위해 시카고에서 열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이승만을 만났다.’ 시카고에서 새크라멘토까지 이승만과 같은 열차 다른 객차에 탑승했다. 이 박사 칸 위층에는 이 박사, 아래칸에는 고데트(Godet)라는 중년여성이 탔다.’ 노디김은 제보가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 고데트라는 여자 주소를 제시했다. 노디김 동행자들은 샌프란시스코 YMCA 회원들이었다. 또 노디김은 이승만이 ‘법률적인 공식 보호자(guardian)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진술했다. 노디김은 ‘오벌린대에서 강연할 때 나를 해치우려고(get rid of) 무던 애쓰던 일본인들이 제보한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get rid of’는 죽이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처리해버린다’는 뜻이다. 노디김은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내려 남동생(오빠)를 만난 뒤 벤투라(Ventura)호를 타고 하와이로 왔다. 하와이에는 엄마가 살고 있었다.
핼시 조사관의 결론: 무혐의 종결
조사를 끝낸 핼시 조사관은 이틀 뒤인 8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장에게 진술서를 첨부한 보고서를 보냈다. (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 파일 4377) 두번째 문장은 이렇다.
‘두 사람과 관련해 귀측이 전달해 준 시카고 이민국 제보에는 정보의 출처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 및 문건 자료가 동봉돼 있지 않다(There is no documentary evidence inclosed by you from the Chicago office in regard to DR. RHEE AND MISS KIM which would give me an inkling of the source of the reports or enable me to judge of their credibility).’
다음은 핼시 조사관이 보낸 문서 발췌본이다.
‘이 박사도 우리 사무실을 방문해 김양과 비슷한 내용으로 진술했다. 귀측이 보낸 편지에는 이승만 아내가 한국 정신병 수용시설에 갇혀 있다고 했다. 이 제보의 구체적인 출처를 알려달라. 한국은 일본정부 지배 하에 있고 일본 본토 내에서도 대도시 한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정신병 수용소가 없다. 일본 정부를 이 박사가 인정하기 않기 때문에 일본 법에 따른 이혼이 불가능하다. 이 박사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전에 이미 별거(separation)해 왔다고 진술했다.
이 박사 행동은 정치적이며 그 목적은 독립 정부 수립이다. 그의 발언에는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다. 나는 제보의 출처가 일본인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I cannot resist the inference that the source in Japanese). 나는 노디김에게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갈 수 있는 외국인용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줬다. 이 박사는 정치적 위험을 고려해 본토로 갈지 유럽으로 갈지 아시아로 갈지 행선지는 귀측에 밝히지 않겠다. 이들의 혐의를 뒷받침할 신빙성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I do not find any trustworthy foundation for the charge laid against them). 처음에는 시카고 이민국에 제보자 신원을 포함한 구체적인 정보를 요청하려 했으나 노디김이 학업을 위해 본토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사건을 여기에서 종결한다.’
핼시 조사관은 한 문장을 첨언했다. ‘이 박사나 김양을 한국으로 추방하면 감옥으로 보내라는 말이다. 고문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To deport DR. RHEE or MISS KIM to Korea would be to send them to imprisonment, possibly torture and death). 보고서를 받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은 9월 8일 시카고 이민국에 ‘제보는 근거 불충분’이라고 보고서를 보내고 사건을 종결시켰다.(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번호 19470/9-7)
상해로 밀항한 이승만의 귀국
1년이 지난 1921년 5월 29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귀국했다. 이번에는 밀항이 아니라 정식 여행자로서 귀국했다. 그리고 11월 워싱턴에서 열릴 군축회의 참가를 위해 8월 10일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 일행을 태운 배는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8월 19일 포틀랜드 이민국에서 샌프란스시코 이민국에 공문을 보냈다. ‘이승만이 16일 본토에 도착했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사건 당사자가 아닌가.’(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번호 5037/46) 8월 24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이 답신을 보냈다. ‘하와이 이민국은 무혐의로 종결하고 이 박사의 샌프란시스코 행 본토 입국허가서를 발급했음.’(미국노동부 이민국 문서번호 12018/10) 사건은 이렇게 허무할 만큼 단순하게 끝났다.
황씨가 대답해야 할 일들
첫째. 이승만이 ‘엄청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엄청난 식사를 해댔으며 백인 여성들까지 이렇게 꼬드겼’나? 앞에 봤듯, 시카고 이민국이 접수한 첫 제보에 들어 있던 이 내용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조사과정에서 삭제됐다.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황씨는 ‘수사 도중에 백인 여성에게 접근해 재벌2세를 사칭 데이트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 근거가 무엇인가. 근거를 대지 못하면 명백한 허위사실 유포다.
둘째. 황씨는 ‘미국에서 재판 받기를 거부하고 하와이에 가서 백인 주류를 꼬드겨 삶았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황씨는 어디에서 보았는가. 사실관계가 틀렸다. 이승만은 신고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 또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허위사실 유포다. ‘백인 주류를 꼬드겨 삶았다’는 허위사실도 마찬가지다.
셋째. 황씨는 ‘분명히 플레이보이로 기소됐다’고 주장했다. ‘기소(起訴)’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관이 법원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뜻이다. 이승만과 노디김이 기소됐나? 기소됐다면 어느 검찰이 어느 법원에 기소했고 그 법원에서 무슨 판결을 내렸는가. 이 사건은 하와이 이민국이 무혐의로 종결했다. 기소 사실 기록을 제시하지 못하면 이 또한 허위사실 유포다. 황씨는 이게 ‘역사적 팩트고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단언했으니까 반드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0대가 넘은 나이에 22살 여인과 끌고 다니다가 사랑행각을 했다’는 주장도 반드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재벌 행세를 했다’는 주장도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황씨는 화면에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수사관에 체포’라고 띄워놓았다. 이 근거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이승만이 언제 샌프란시스코에서 체포됐고, 체포한 기관은 어디인지 꼭 제시해야 한다. 이승만은 6월 19일 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이틀을 쉬고 새크라멘토 모임(19~20일), 샌프란시스코 모임(21일)에 참석한 뒤 22일 하와이로 떠났다. 이 이승만은 누구인가. 반(反)이승만 정서를 가진 로버타 장의 ‘하와이의 한인들-사진으로 보는 미주 한인 100년사 1903-2003′(눈빛출판사, 2008, p119)에도 체포나 기소 이야기는 없다. 황씨는 아무도 모르는 사료를 인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 사료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승만의 수양딸, 노디김
그렇다면 노디김(1898~1972)은 누구인가. 이승만의 수양딸이다. 아버지 김윤종이 1913년 6월 15일 ‘나의 13세 여식(女息) 또라를 리박사 승만씨에게 수양녀로 주어 나와 나의 부인인 김윤덕이 그 부모된 권한과 임을 영구히 넘겨 맡기며 이를 위하여 자에 성문으로 증명함’이라고 적은 문서로 이승만에게 부양을 맡긴 딸이다. 또라는 노디김의 아명이다.
이 문서는 2013년 이승만 연구가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이 공개했다. 이덕희 소장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 김윤종은 1914년 노디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만주로 갔다.(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2015, p239) 그런데 황씨는 ‘아빠와 딸 같은 관계입니다’라는 자막으로 두 사람 관계를 묘한 뉘앙스로 몰아놓았다. 노디김은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강연을 하며 활동했다. 2021년 대한민국정부는 김노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에는 ‘김노디’로 등록돼 있다.
그래서 황씨는 화면에 띄운 이 여자 사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여성은 노디김이 아니라 신마실라(1892~1965)다. 본명은 신마숙이다. 2022년 영화 ‘백년전쟁’ 속 사진 오류를 지적한 당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교수에 따르면 신마실라는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신마실라 또한 2015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2013년 ‘백년전쟁’을 만든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또한 이 신마실라 사진을 이승만 사진과 합성해 범죄자 사진처럼 꾸며놓았다. 황씨는 1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사진을 사용해 뒤죽박죽된 주장을 하고 있다.
“잘못 설명했으면 고개 숙이겠다”고?
황씨가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인 2023년 8월 12일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영상이다. 영화 ‘건국전쟁’이 인기몰이를 하자 ‘6개월 후를 내다 본 30만뷰 영상. 이승만은 이걸로 종결’이라며 다시 올린 영상이다. 6개월 전 영상은 첫화면이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승만을 존경할 수 없는 24가지 이유’였는데 다시 올린 영상은 하나가 늘어서 ‘25가지 과오’다.
그만큼 연구 성과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히고, 본인이 연구한 결론에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올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욱 더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영상에서 황씨가 말했다. ‘만약 제가 이 나열한 내용 중에 학문적으로 뭔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이승만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분들께서 이의를 제기해 주시고 제가 만약에 잘못 설명한 것이 있다라고 하면 저 반성하고 그 부분만큼 분명히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하나하나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고개를 숙이면 될 잘못’으로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