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25년 11월 APEC 정상회의가 열릴 경북 경주 보문관광단지 일대의 항공사진. photo 경주시

한국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2025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최지가 경북 경주로 사실상 확정된 가운데,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투숙할 5성급 호텔 확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APEC 정상회의 기간 중에는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한데 모이는 전체회의를 비롯해, 개별 양자·다자 정상회담이 수시로 열린다. 이에 해외 정상들의 투숙과 개별 정상회담 개최가 가능한 5성급 호텔은 회의 성공의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하지만 현재 경주에서 동원가능한 5성급 호텔은 힐튼호텔, 라한셀렉트호텔(옛 현대호텔) 단 2곳뿐이다. 경주 지역의 나머지 호텔들은 3~4성급이거나 회원제 콘도, 기업연수원, 모텔 위주다.

특히 21개 APEC 회원국 가운데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 정상들이 총망라돼 있어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난해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불참한다고 해도 당장 주요 강대국 간 숙소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푸틴은 2022년 태국 방콕 APEC은 물론,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APEC에도 불참했다. 특히 미국이나 중국은 보안문제 등을 이유로 호텔을 통째로 빌리는 것을 선호하는 터라, 정상 숙소 확보 문제는 내년 11월 경주 APEC을 앞두고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경주, 5성급 호텔 단 2곳

경주는 주요 강대국 정상 숙소를 배정하기에도 동원할 수 있는 5성급 호텔이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관광협회중앙회에 따르면, 현재 경주의 호텔 가운데 5성급 호텔은 2곳(힐튼·라한셀렉트), 4성급 호텔은 3곳(코오롱·코모도·더케이)에 그친다. APEC 제1회의장이 될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주위로 블루원·소노벨(대명)·한화·켄싱턴·일성 등의 회원제 콘도와 농협·KT·황룡원 등 기업연수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상 숙소 및 개별 정상회담장으로 이용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지적이다.

이 같은 사정 탓인지 경주는 그간 양자 정상회담을 유치한 적이 있지만, APEC과 같은 대규모 정상회의 개최 경험은 전무했다. 2005년 11월 부산 APEC 개최에 앞서 경주 현대호텔(현 라한셀렉트)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 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바 있다. 그보다 앞선 1993년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당시 일본 총리 간 한·일 정상회담이 경주 힐튼호텔에서 열렸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2009년 부주석 신분으로 경주를 찾은 적이 있지만, 서울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 예방 등 주요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경주를 잠깐 들러 현대호텔에서 만찬을 하는 형태였다.

이에 5성급 호텔 부족 문제는 경주와 함께 APEC 유치전을 벌인 제주와 인천이 집중 공격한 부분이었다. 현재 제주는 21개, 인천은 8개의 5성급 호텔을 확보하고 있다. 회원제 콘도와 기업연수원은 제외한 숫자다.

이 같은 우려에 주낙영 경주시장은 유치전 과정에서 “경주가 다른 도시에 비해 숙박시설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가진 분들이 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APEC 정상회의(2012년)가 열릴 당시에는 대학교 기숙사를 숙소로 사용했고, 멕시코의 로스카보스(2002년)는 인구 6만여명이 있는 관광도시지만 마찬가지로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로스카보스는 멕시코 서부의 세계적 휴양지로 월도프 아스토리아·리츠칼튼·포시즌·하얏트·힐튼·메리어트·웨스틴 등 글로벌 브랜드 5성급 호텔이 즐비한 곳이다. 경주의 글로벌 브랜드 5성급 호텔은 힐튼이 유일하다. 이에 유정복 인천시장은 경주가 2025년 APEC 개최지로 선정된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인천은 8개 호텔(5성급 기준)에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 39개가 있는데 경주는 2개밖에 없다”며 “호텔의 방을 트거나 민간시설을 이용하고 문화발전기금을 이용한다는데 굉장히 불투명하고 과거 부산 APEC 사례로 봤을 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성토했다.

2005년 부산 APEC 때도 숙소전쟁

20년 전인 2005년 부산 APEC 때도 강대국 간 숙소전쟁이 치열했다. 당시 총 6곳의 5성급 호텔이 정상 숙소 및 개별 정상회담장으로 동원됐는데, 정상회의장인 해운대 누리마루 APEC하우스 인근 5성급 호텔이 부족해 주요 강대국 간 숙소전쟁이 벌어졌다.

주최국인 한국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해운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파라다이스호텔에 진을 치고 본부 호텔로 사용했고,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누리마루APEC하우스와 가장 가까운 웨스틴조선호텔,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그다음으로 가까운 해운대 그랜드호텔(현재 철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해운대 메리어트호텔(현 그랜드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종합국력 순으로 정상회의장과 가까운 숙소가 배정된 셈.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부산 서면의 롯데호텔에 짐을 풀었고, 도널드 창 당시 홍콩 행정장관은 부산 동래 농심호텔을 배정받았다. 두 호텔 모두 해운대 누리마루APEC 하우스와 10㎞ 이상 떨어진 곳들이다. 원래 부산역과 가까운 부산 중구의 코모도호텔도 정상 숙소로 사용하려고 준비했으나, 일부 정상이 회의장과 20㎞ 가까이 떨어진 코모도호텔로 배정한 데 따른 불만을 표시해 결국 정상 숙소에서 제외됐다. 나머지 국가 정상들은 이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 국가 정상들의 숙소를 우선 배정한 뒤 안배하는 식으로 숙소 배정이 이뤄졌다.

아울러 경주 APEC 주 무대가 될 보문관광단지 일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해 국내 첫 관광단지로 조성한 뒤, 제대로 된 후속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시설노후가 심각하다. 경주시가 제2회의장으로 제안한 보문단지 내 ‘육부촌(六部村)’ 주위에 조성된 노후 한옥상가 문제도 APEC 개최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보문관광단지를 관리하는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가 사옥으로 쓰고 있는 ‘육부촌’은 보문관광단지 개장 당시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를 본떠 국제회의장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다. 육부촌 주변의 기념품점 등으로 쓰이는 한옥상가는 시설노후화가 심각해 사실상 개점휴업 중이다. 이와 관련 경주시는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진 보문관광단지 종합상가는 개보수를 통해 APEC 사무실로 제공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1979년 보문단지 조성과 함께 개관해 한때 경주 최고의 호텔로 군림했던 콩코드호텔(옛 도큐호텔)도 2016년 문을 닫은 이래 7년 넘게 유령호텔로 방치돼 있다. 콩코드호텔은 보문호를 낀 보문단지 한가운데 자리해 있어 보문단지 활성화의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이와 관련 경주시 APEC 추진단의 한 관계자는 “콩코드호텔은 APEC 때 별다른 활용계획이 없다”며 “사업자 측과 협의가 잘 안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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