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찰청은 22만명가량이 참여 중인 한 텔레그램 채널에서 딥페이크 성범죄물이 확산한 혐의를 수사 중이라고 27일 밝혔다. 경찰은 익명성이 상당 부분 보장되는 텔레그램이 딥페이크 성범죄의 온상이라고 보고 수사를 확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텔레그램에서 유포하는 딥페이크 성범죄물 피해자 가운데는 중·고교생 등 미성년자뿐 아니라 대학생, 교사, 여군 등도 대거 포함돼 있다고 한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의 80%가량이 여성으로 추산된다. 경찰은 28일부터 7개월간 딥페이크 성범죄 관련 특별 집중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문화미래리포트2024'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일선 초·중·고와 대학가, 군대·회사에까지 급속히 번지고 있는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해 “딥페이크 영상물은 단순 장난이라 둘러대기도 하지만, 익명의 보호막에 기대 기술을 악용하는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강력 대응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관계 당국에서는 철저한 실태 파악과 수사를 통해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아 달라”며 “건전한 디지털 문화가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교육 방안도 강구해 달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딥페이크 범죄 근절을 위한 국회 차원의 대책 마련을 당에 지시했다. 이 대표는 “피해자 보호 방안과 딥페이크 제작·배포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정을 강구하라”고 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야 의원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주 정부에서 관련 보고를 받고 법률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소속인 이인선 여성가족위원장은 “기존 개인정보보호법과 명예훼손 법률로는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범죄 특수성을 제대로 규율하지 못하고 피해자에 대한 구제 장치가 부족하다”며 “법적 제도를 강화하고 여성·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마약 범죄와 같은 수준으로 단속을 시작해야 한다”며 “관련 입법이 필요하면 국회와 협의해 추진하고, 기본적으로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교육도 처벌과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백형선·Midjourney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우리 누구나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딥페이크 성범죄가 최근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면서 10·20대 여성 등 피해자들은 ‘죽고 싶다’며 우울과 불안을 호소한다. 전문가들은 “가해자들에겐 한순간 장난이겠지만 피해자들은 인생 자체가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그냥 신기하고 재밌어서” “아는 여자애 사진을 넣으면 더 실감나니까” 같은 이유로 10대 사이에서 ‘놀이’처럼 무분별하게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터치 몇 번만으로 손쉽게 합성 영상을 만들어주는 앱이 속속 출시되면서 범죄 접근성은 높아졌고 경각심도 낮아졌다. 텔레그램 등 신원 추적이 힘든 경로를 통해 딥페이크 영상이 확산되면서, 유포자들 사이에선 “경찰에 걸리는 사람이 바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허위 영상물을 만들어 배포해 입건된 10대는 2021년 51명, 2022년 52명, 지난해 91명, 올해 1~7월 131명으로 3년 새 약 2.5배로 늘었다. 최근 4년간 입건된 피의자 중 절반이 넘는 325명(70.5%)이 10대였다.

그래픽=백형선

학부모들 사이에선 “내 아이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올해 1∼7월 초·중·고교 텔레그램 성 착취 신고를 10건 접수, 14세 이상 청소년 10명을 입건했다. 부산교육청 등에 따르면, 지난 6월 부산 해운대구의 중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 4명이 같은 학교 여학생 18명의 얼굴 사진에 다른 신체 이미지를 합성한 음란 사진을 만들어 공유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피해자 중에는 이 학교 교사 2명도 있었다. 이들은 AI를 활용해 합성한 사진 80여 장을 인스타그램 단체 대화방을 통해 공유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피해 여성의 신상을 유포하거나, 피해자를 협박, 금품을 요구하는 범죄도 서슴지 않고 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줄 뿐 아니라, 피해자가 정상적 학교·사회생활을 꾸려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악질 범죄”라고 했다. 현행 성폭력처벌법은 타인의 의사에 반해, 배포 목적으로 성적 욕망·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편집·합성물을 만들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고 있다. 지난 5월 딥페이크 성범죄물 유포가 적발된 서울대 졸업생 박모(39·구속)씨와 서울대 로스쿨 졸업생 강모(31·구속)씨를 비롯, 20~50대 남성 3명은 이에 따라 기소된 상태다.

부산지법 서부지원은 지난 4월 같은 학교 여학생을 상대로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만든 19세 학생 B군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 명령을 내렸다. B군은 작년 4~5월 여학생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사진을 캡처한 후 텔레그램 딥페이크 합성 프로그램을 이용해 여성 나체 사진에 피해자 얼굴을 합성하는 등 여학생 4명의 얼굴∙신체를 대상으로 7차례에 걸쳐 20여 장의 딥페이크물을 합성한 혐의를 받는다.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이 ‘물리적 접촉이 없었다’는 이유로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여대 김명주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디지털 시대 개인의 인격 자체가 말살되는 중범죄인 만큼 형량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여성계에선 “가해자 엄벌뿐 아니라 어린 나이에 깊은 상처를 입는 피해자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