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두고 국가보훈부와 광복회가 충돌하면서 지난 8월 15일 광복절 행사가 반쪽 행사가 되었다. 정부가 주최하는 광복절 경축식에 이종찬(李鍾贊) 광복회장이 불참했고 대신 이 회장은 별도 행사를 가졌다.
8·15 광복의 기쁨을 비극으로 바꾼 3·8선처럼 우리 사회는 ‘친일파’ ‘뉴라이트 극우’ 논란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독립기념관장 한자리를 두고 대한민국이 진영(陣營) 대결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광복회는 여론전을 주도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관장 자리를 두고 뜬금없이 건국절 제정 문제를 끄집어냈다.
반쪽 광복절의 비극
이종찬 회장이 “정부가 ‘1948년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광복절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건국절 제정을 추진한 적이 없고 지난 8월 8일 취임한 김형석(金亨錫) 독립기념관장 역시 건국절 제정에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광복회는 끝내 광복절 행사에 불참해버렸다.
이후 한국 사회의 3중 갈등 구조인 이념·세대·계층 갈등이 분출되었고 이 가운데 정치권이 갈등에 소금을 뿌렸다. 모든 논란의 정점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충남 천안으로 내려갔다.
9월 2일은 독립기념관의 휴무 날이었다. 입구 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에서 내건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갈등이 첨예해진 상황을 한 줄로 대변하고 있었다.
“유관순 누나가 통곡한다. 뉴라이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하라.”
독립기념관을 감싼 소란스럽고 술렁이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고려 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했다는 ‘겨레의 집’의 늠름한 기와를 보는 순간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우뚝 솟은 ‘겨레의 탑’, 화강암으로 만든 ‘불굴의 한국인 상(像)’이 우리 민족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아주 대조적인 안정감과 응집력이었다.
역대 관장 13명 중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의사의 종질, 박은식(朴殷植·1859~1925년) 선생의 손자, 윤봉길(尹奉吉·1908~1932년) 의사의 손녀, 지청천(池靑天·1888~1957년) 장군의 외손자까지 10명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관장이 되었다.
김 관장을 제외한 나머지 2명(김삼웅, 한시준)은 언론인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학자였다. 이들은 ‘진보 정권’이라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임명됐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김형석 관장은 현대사를 전공한 보수 성향의 역사학자로 (사)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일각에서는 “악명조차 듣지 못한 듣보잡”이라며 짤그락 소리가 나는 평을 했지만, “때가 안 탄 정직한 학자”를 반기는 이들도 존재한다. 역사학계가 편향적인 사관(史觀)에서 기회주의적인 작은 우두머리들의 공론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기자는 거친 공성전(攻城戰)에 가려 들리지 않는 다른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다. 그는 ‘성실하고 독실한 크리스천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좌우이념의 한쪽에서 역사를 재단(裁斷)하지 않고 ‘국민통합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역사인식’을 강조한 학자다. 어느 한쪽에 서지 않았으니 외로울 수밖에 없다.
“광복절 행사에서 많이 울어”
독립기념관의 행정사무공간인 ‘겨레누리관’ 4층에서 김형석 관장을 만났다.
― 제79회 광복절 행사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대통령이 참석한 광복절 기념식과 야당 정치인이 우르르 몰려가는 기념식으로 양분이 되었어요.
“반쪽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이 주관하는 행사가 온전히 치러졌고 그분들(광복회 등)이 별도로 거행한 건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광복의 의미가 뭡니까? 광복절 행사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조국이 해방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긴 걸 갖다가 축하하는 자리인데 저는 그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부 공식행사에 참석해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제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이 사람, 왜 이렇게 우나’ 했을 겁니다. 막, 그냥 눈물이 나와서 주체가 안 되더라고….”
그러더니 마치 탄식을 하듯 이런 말을 덧붙였다.
“빨리 이걸, 제발… 이런 놈의 역사전쟁을 빨리 좀 끝내고 내년 광복 80주년 행사 때엔 정말 하나 된 모습을 보여줘야 될 텐데….”
― 공교롭게도 관장님께서 2022년 8월 15일에 《끝나야 할 역사전쟁》을 펴내셨잖아요. 비약인지 모르나 역사전쟁에 ‘끌려들어 가’ 어떤 식으로든 끝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셨어요.
이 책의 부제는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이다. 지금 김 관장에게 쏠린 모든 시선이 ‘오해와 진실’의 양 갈래에 서서 그를 거칠게 낚아채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이 책 서문을 그해 5월 10일 썼지 않습니까? 그날이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날이었거든요.
취임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마지막으로 남겨둔 서문을 쓰고 출판사(동문선)에다 원고를 넘긴 거예요. 그렇게 탈고 후 책이 나온 게 8월 15일 광복절이거든요.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윤석열 정부에서 독립기념관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는 책 1부 끝부분에다 이렇게 썼다.
<지금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을 치유할 바른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따르는 보수와 김구 선생과 김대중 대통령을 따르는 진보 세력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상호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국민 통합의 첫걸음이다. 아무튼 새롭게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가 ‘갈등공화국’ 대한민국의 분열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서 화합하는 사회로 변화되기를 기대해본다.>
윤 대통령이 이 문장을 봤을까. 적어도 용산 대통령실의 참모 그룹에서는 이 문장을 보지 않았을까.
김 관장은 잠시 양볼이 홀쭉한, 아마도 마음고생을 해서 그럴 테지만, 피곤한 듯한 미소를 띠며 “하여튼 윤석열 정부의 차관급 공직자인 독립기념관장을 맡게 되었고, 이게 결과론이지마는 광복회가 가지고 있던 제일 큰 밥그릇을 빼앗아버린 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김 박사님 같은 분이 애국자”
― 이종찬 광복회장과 구면이시죠?
“지난 2월 1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 선생 추모 학술회에서 뵈었어요. 제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분이 제일 앞자리에 앉으셔서 강연 끝날 때까지 열심히 메모를 하시더군요. 이후 같은 달 27일 광복회 사무실에서 이종찬 회장, 손병두 전 서강대 총장 등과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데 저더러 ‘만나본 독립운동사 연구자 가운데 제일이다, 독립운동사 연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날 자리를 같이한 민주당 국회의원에게도 절 소개하며 ‘우리 김 박사님 같은 분이 애국자’라고 막 그랬는데….
제가 (이종찬 회장의 조부인) 우당(右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년) 선생에 대한 글을 써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2017)에다 이름을 올려드린 적도 있어요. 그 사실도 언급하며 글 잘 써줘서 고맙다고 그러시고….”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기획하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문집으로 발간한 책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독립기념관장 후보자 면접심사 때 나눈 발언을 외부에 공개하며 “김 관장이 일제 시대 조선인 국적은 일본이라고 했다”며 친일파, ‘뉴라이트 학자’라는 낙인(烙印)을 찍었다.
“저더러 ‘독립운동사 연구자 중 제일’이라던 분이 대뜸 ‘당신은 말이지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과 김구 ( 金 九·1876~1949년)를 갈라가지고 좌파와 우파를 편 가르기나 하고 그렇게 해서 국민들 싸움시키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독립기념관장을 하려느냐’는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제가 쓴 《끝나야 할 역사전쟁》을 드렸을 때 그분은 ‘이게 답’이라고 했었습니다.”
“‘파운딩 파더스 캠페인 하자’더니…”
― ‘이게 답’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광복회랑 같이 ‘건국의 아버지들’, 파운딩 파더스(Founding Fathers) 캠페인을 하자는 거예요.”
현재 우파 진영은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부르지만 좌파 진영은 김구를 ‘건국의 아버지’로 부른다. 김 관장은 “미국에선 국부(國父)라는 명칭 대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라고 표현한다”며 “우리도 독립(건국)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을 다수 선정해 ‘건국의 아버지들’로 존경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극한적인 진영 대결을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우파, 좌파 양대 진영이 이승만을 두고 ‘신화화’ ‘악마화’의 극단적인 담론 대결을 펼치잖아요. 이 회장은 ‘김구를 존경하고 이승만을 존경하고, 이게 정답’이라 하셨어요.”
김 관장은 지난 2월 27일 이종찬 회장과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을 기자에게 공개하며 비탈길을 숨차게 올라선 듯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보면 저에게 지나칠 정도로 극찬하셨던 분인데 ‘이승만, 김구를 갈라 치기 하고 말이지, 좌파, 우파를 분열시키고, 지금도 생각이 그러냐’고 막 이러시고….
속으로 ‘이분이 왜 나한테 이러시나’ 생각하는데 그때 문제의 질문을 한 거야.”
이 회장은 김 관장에게 “일제 시대 우리 국민의 국적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망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한 것 아닙니까?”
김 관장의 부연 설명이다.
“답변 뒷부분은 자르고 앞부분 ‘국적은 일본’이라고 한 얘기도 각색을 해서 제가 ‘일본 신민(臣民)’이라 했다는 겁니다.”
“친일파, 광복과 함께 시효가 끝난 용어”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9월 1일 “이종찬 광복회장님도 정말 분노를 많이 하셨는데, ‘우리가 일본 황국의 신민이었다’라고 하는 사람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했다”고 비난하며 김 관장의 ‘일본 신민’ 발언을 기정사실화했다.
“당시 국권을 강탈당해서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었습니다. 그분은 그걸 원치 않았지만 국적이 일본이 아니면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달고 뛰었던 겁니다.
우리가 한일 합방을 당했다는 게 강제로 국권을 탈취당한 것 아닙니까? 백성들은 원치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일본 국민이 되었단 말이에요. 이런 가운데 국권을 되찾으려고 독립 투쟁을 했지 않습니까. 사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국적 문제는 학계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허헌(1884~1951년), 김병로(1887~1964년)와 함께 조선의 3대 인권 변호사로 불리는 이인(1896~1979년) 선생이 1932년에 발표한 <조선인의 국적법>(《별건곤》 32호. 1930. 9)이란 논설에서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다’라고 명확하게 밝혀놓은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 친일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를 내려 주십시오.
“일제강점기의 특수한 상황에서 파행한 매국적(賣國賊)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죠. 1945년 광복과 함께 시효(時效)가 끝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친일파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요. ‘토착왜구’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는데 항일 유학자 이태현(李泰鉉·1838~1904년)이 쓴 《정암사고(精菴私稿)》라는 책에 ‘토왜(土倭)’라는 말이 ‘친일 부역자’란 뜻으로 사용됐어요. 이 ‘토왜’를 현대식으로 풀어쓴 말이 ‘토착왜구’라는 주장도 있지요.
그렇지만 실상은 ‘언어의 유희’일뿐, 실제로 토착왜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보 정치 세력이 보수 정치인을 겨냥하여 만들어낸 프로파간다(propaganda)일 따름입니다.”
―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친일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군요.
김 관장에 따르면 1965년 한일수교를 통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룬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해서는 ‘대일 청구권자금’으로 경제 개발에 활용하여 성공한 ‘용일(用日)’이라는 주장과 ‘선조의 희생 대가’를 돈으로 청산한 ‘굴욕’이라는 상반된 관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일본의 군주를 ‘천황’이라고 공개 천명하며, 1989년 1월 9일 히로히토의 분향소를 찾아가 절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국익(國益)을 위한 ‘실리주의(實利主義) 외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국격(國格)을 저버린 ‘저자세 외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일(對日) 인식’이 친일이었는지, 또는 극일(克日)이었는지는 그들 내면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전 생애를 통해서 어떤 공(功)과 과(過)를 기록했는지 계량적인 검증도 필요해요. 어떤 위인도 완전한 삶을 산 경우는 없어요. 이 때문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를 향하되 과거에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 대화는 미래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웃지 마시고 근엄하게, 심각하게…”
김 관장은 지난 8월 27일 처음으로 국회 정무위에 출석해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야당 의원들의 매서운 질책과 무시를 당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으리라. 다음은 정무위 질의응답 과정이다.
<천준호 의원(더불어민주당): 김형석씨한테 질의를 했는데 웃지 않습니까?
강준현 의원(민주당): 저한테 잠깐만 시간을 주십시오.
윤한홍 정무위원장: 강준현 간사님 1분만 하세요.
강: 지금 제 자리에서 김형석 관장님 얼굴이 곧바로 보이거든요? 위원장님, 좀 아까 질의하는 순간 계속 속된 말로 비웃는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계속. 지금도 그러세요, 지금도 그러세요. 관장님, 이러시면 안 돼요.
그래서 위원장님, 독립기념관장에게도 경고를 좀 주셔야 돼요.
윤: 행정부에서 오신 분들 좀 근엄한 표정 짓고 계시기 바랍니다. 웃지 마시고 근엄하게, 심각하게 표정을 짓고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천: 위원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위원들을 조롱하시는 겁니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라니요? 경고를 주셔야지요. 왜 동료 위원들을 조롱하십니까.
윤: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웃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사람 얼굴에 따라서 다른 거지요.>
― 엄숙한 국회에서 왜 웃으셔서….
“국회라는 데를 가보니까 참 기가 막히더라고요. 아침부터 여러 지인이 문자를 주시면서 ‘절대 화내지 마라’ ‘인상 쓰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안 좋으니까 항상 가벼운 미소를 지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볍게 미소를 띠고 있는데 책상을 치면서 관장이 우리를 비웃는 거냐고 벌떼처럼 나서서….
급기야 정무위원장이 ‘근엄하게, 심각하게’ 표정을 지으라고 했어요. 그날 오후 배달된 《문화일보》 기사의 제목이 ‘코믹 국회’였잖아요.”
“말도 못 하게 할 바에야 왜 불렀느냐”
이날 상임위에서 사회민주당 한창민 의원과의 입씨름도 논란이 됐다.
한 의원은 영상자료를 띄우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소위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책 내용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 정부와 협력한 인물들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또한 ‘현재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난무하고요, 또 일제 피해자에 대해서는 ‘피해자 중심 서술은 불균형적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상주의에 기초한 무모한 행동이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한 의원과 김 관장의 문답이다.
<한창민: 지금 이 내용은 누가 한 말입니까?
김형석: 모르겠습니다. 제 책에는 저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한: 이 책 내용이, 제가 실수로 얘기했는데 또 거짓말을 하시네요, 이게 바로 본인의 저술 내용입니다.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닙니까?
김: 아닙니다.
한: 저희들이 확인해가지고 나왔는데….
김: 확인해주십시오.
한: 당시에 이런 관점의 서술을 한 적이 없다….
김: 예, 그렇습니다.
한: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김: 예, 그렇습니다.
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책임지실 거지요?
김: 예, 그렇습니다.>
“제가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추궁을 해가지고 어차피 카메라가 있으니까 그 순간만…. 다른 야당 국회의원은 ‘관장이 왜 그렇게 언론들과 만나 자꾸 말썽을 일으키냐’고 그래요.
제가 ‘설화(舌禍)를 불러일으키려 한 게 아니다’고 했더니 ‘네, 아니오’로만 답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도 못 하게 할 바에야 왜 불렀느냐’고 하니 ‘저 태도 좀 보라’고 막 난리를 치는 거예요. 더 기가 막힌 게 뭔 줄 아세요?
‘친일’ ‘일본 신민’ 논란이 있은 후에 정말 그런 발언을 했느냐고 묻거나 뉴라이트와 관련돼 있는지 묻는 기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다 광복회 주장대로 받아쓴 거죠.”
“독립운동가 후손들, ‘과거’만 얘기”
김형석 관장은 “주위 사람들이 묻기를 ‘김구 선생의 장손자가 (독립기념관장에) 지원했다던데, 당신처럼 무명의 인사가 어찌해서 됐느냐’며 ‘대통령과 무슨 관계냐. 거대한 배경이 뒤에 있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 토로했다.
“제 책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 보면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걸 보고 기자들이 취임식장에 초청받질 않았느냐며 대통령과의 인연을 추궁해요. 그래서 말했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 취임식에 모두 초청받았다고….
제 답은 한결같아요. ‘내가 왜 됐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면접 심사위원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유는 딱 한 가지더군요.”
― 그 한 가지가 뭔가요.
“독립운동가 후손이신 분들은 ‘과거’만 얘기했다는 겁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 독립운동가셨고, 우리 집안이 희생을 했으니, 당연히 관장이 돼야 한다고요. 그런데 저는 ‘미래’를 얘기했어요.”
― 어떤 ‘미래’를 얘기하셨나요?
“독립기념관이 개관하던 그해(1987년)에 6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6분의 1도 안 와요. 입장료가 없어졌는데도 안 옵니다.
건물은 40년이 지났으니 낡았지 않습니까? 또 건축물은 군사 문화의 잔재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도저히 무언가를 전시할 공간이 아닙니다. 전시물도 1년 내내, 아니 몇 년 동안 안 바뀌니 어쩌다 오는 사람도 볼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해요. 교통 접근성이 안 좋다는 것도 핑계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김 관장은 이 대목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내년이 광복 80주년이지 않습니까? 국민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어요? 제 임기가 끝나는 3년 뒤에는 개관 40주년이 됩니다. 독립기념관의 불혹의 나이를 기념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순천만 국가정원과 습지에 지난해 778만 명의 입장객이 다녀갔다. 용인 에버랜드는 588만 명으로 2위를 기록했다. 고양 킨텍스, 경복궁, 롯데월드가 3~5위를 차지했다.
― 전국 공공시설 중 입장객을 제일 많이 확보한 곳이 순천만 국가정원이라고 합니다.
“순천이 용인 에버랜드를 제친 겁니다. 이유는 뭐냐? 보고 쉴 수 있다는 말이에요. 가족끼리 쉴 공간이 있고 보고 즐길 게 있단 말입니다. 순천과 비교해 천안은 3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수도권과 가까우니 우리가 훨씬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느냐에 키 포인트가 있어요.”
“패러다임의 전환 가져봐야”
김 관장은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보자. 120만 평의 광활한 부지가 있고 단풍나무, 자작나무 다 있으니 야외 전시장으로 활용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에버랜드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 것은 ‘밤’ 개장이라고 합니다. 야간 조명이 좋으니까. 우리도 야간 조명을 이용해 밤에 독립운동과 자연을 연결한 그런 축제를 기획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독립운동, 그러면 떠오르는 게 3대 종교 아닙니까? 민족대표 33인 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가 참여했잖아요. 매년 초파일에 불교계와 협력해 ‘불교와 독립운동 기획전’을 전시하고 곁들여 저녁에 연인들도 참가하는 연등 축제를 열면 어떨까요?
3·1운동 당시 조선 인구가 20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천도교인이 300만 명이었어요. 10월 단풍축제 때 동학과 천도교 관련 행사를 가지면 관심을 끌 겁니다.
마찬가지로 12월에 ‘기독교와 독립운동 특별전’을 크리스마스 축제와 함께 개최하는 겁니다.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전국 교회와 기관들이 저 독립기념관의 아름다운 숲길에다 성탄절 트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캐럴 송을 실컷 듣게 하고요.
또 천안시와 매년 ‘K-컬처’ 축제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좀 더 아이디어를 짜내면 왜 1년에 500만 명의 관람객을 못 모으겠어요. 저는 대학교수 하다가 나와서 NGO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모금운동을 했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김 관장은 “독립기념관법에 보면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전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현재 100%가 다 국난극복사만 돼 있지 국가발전사 전시는 하나도 안 돼 있어요.
독립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려면, 한국의 경제발전을 자세히 소개하고 한국의 기업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개관 4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인 전시공간을 우리 기업들의 후원으로 유치하면 어떨까요? 서울대에 있는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관정도서관 아닙니까. 관정(冠廷) 이종환(李鍾煥·1924~2023년) 교육재단의 지원으로 지어지지 않았나요?”
여수 국군통합병원에서 태어나
김형석 관장은 1955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공대생인 아버지는 6·25 발발 직후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수도 고지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 이후 7년 8개월의 군생활 가운데 절반 가까운 시간을 군병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부산사범학교를 나온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여수로 오게 됐고 김 관장은 여수 국군통합병원에서 태어났다. 경상도 부모를 둔 그가 전라도 땅에 태(胎)를 묻게 된 사연은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을 마주한 듯했다.
대전현충원에 세워진 아버지의 묘비에는 1952년에 받은 화랑무공훈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김 관장은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임관해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79년 전역 후 잠시 기자를 꿈꿨으나 그해 10·26 사태가 일어나 어느 곳도 기자를 뽑지 않았다. 때마침 오산고등학교에서 교사 모집 공고가 났고 25대 1의 경쟁을 뚫고 역사교사가 되었다.
오산고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년) 선생이 세운 민족사학이다. 조만식(曺晩植·1882~1950년), 홍명희(洪命熹·1888~1968년)가 교장으로 부임했던 곳이다. 또한 기라성 같은 사회 지도자인 한경직( 韓景職·1902~2000년), 함석헌(咸錫憲·1901~1989년), 홍종인(洪鍾 仁·1904~1998년), 김홍일(金弘壹·1898~1980년) 등을 배출했다. 김 관장의 말이다.
“당시 이름만 대도 놀랄 만한 인사들이 학교를 찾아왔어요. 제 별명이 ' 양로원 총무’입니다. 담당 과목이 역사니까 80대 어르신들을 맨날 모시고 다녔어요. 함석헌 선생이 당신 집문서를 가지고 찾아와 기념사업을 하자고 해서 남강문화재단이 만들어진 겁니다.”
김 관장은 학생들 가르치랴 남강문화재단 업무 맡으랴 대학원 수업 들으랴 1인 3역을 하며 뛰어다녔다. 오산고총동창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경희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1991년부터 95년까지 총신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쳤다.
젊은 시절 삶의 모토는 ‘독서불망구국(讀書不忘救國)’이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라 구하는 것을 잊지 마라’는 뜻이다.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된다는 신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 굳은 신념은 1995년 북한에서 대홍수 피해가 났을 때 인도지원 사업에 투신하기 위해 급기야 교수직을 그만두게 이끌었다.
‘김신저’
1997년부터 2001년 6월까지 북한에만 33번을 다녀왔다. 2001년에만 12번 북한을 찾았으니 평균 한 달에 한 번꼴로 북한에 다녀왔던 셈이다. 1970년대 비밀외교를 일삼던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에 빗대어 사람들은 그를 ‘김신저’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후원자를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전직 대학교수라는 이점을 살려 강연회를 통해 적지 않은 후원자를 확보했다. 교회, 학교, 국가기관, 기업이나 심지어 동민회, 면민회까지 1년에 거의 200~300회나 되는 강연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고 한다.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어요.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운영위원장,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죠.”
당시 한민족복지재단을 후원하는 교회가 전국적으로 3000개 가까이나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4만5000개이고 그 가운데 75% 정도가 미(未)자립교회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교회가 후원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IMF로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한민족복지재단은 그 무렵 국내 26개 대북지원단체 중 가장 많은 물자를 지원하는 NGO로 자리 잡게 됐다. 이 시기에 NGO로 ‘뉴밀레니엄 지구촌 빈곤퇴치운동’ ‘한민족어린이돕기 네트워크’ 등에서 활동하며, UN경제사회이사회가 개최한 제1회 국제NGO혁신박람회에 아시아 대표로 선정되었다.
“신뢰하여 믿고 맡기던 직원들이 제출한 서류에 하자가 발생, 보조금의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인정돼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기 도 했어요. 공금 횡령 등 4가지 혐의는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우리 집을 담보로 1억원을 빌려 기부한 일도 있어요.
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가 살아온 삶을 감추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제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실천할 생각입니다.”
기자는 김 관장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를 찾았다. 흰색 단층 건물이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독립운동사 연구의 메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소가 비좁아 연구원들이 3곳으로 분산돼 있다고 한다. 한눈에 봐도 낡고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식당으로 쓰던 건물이라고 했다. 현재 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46명이고, 그중에 박사급 연구원이 2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운동사연구소 이명화 소장은 “외부만 리모델링했지 내부는 연구소라 하기 무색하다. 겨울이면 춥고 심지어 비가 새는 곳도 있다. 자료 보관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풍찬노숙 하듯 연구하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 관장, 이 소장 등과 천천히 연구소 곳곳을 둘러보았다. 통로가 상당히 비좁았고 곳곳에 쌓아 올린 자료들이 눈에 밟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독립운동을 했듯이 수십 해가 바뀐 현재까지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우리 연구원들이 해외에 나가 자료를 수집하고 학술교류도 하는데 연구 환경이 너무 비교가 된다는 말을 자주 해요. 우리끼리 있으면 괜찮은데 외국 연구자들이 한국을 찾아와 방문하겠다고 하면 난감합니다. 우리 연구소의 연구업적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니까 말이죠.”
이 소장은 “독립운동사 전공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도 했다.
“우선 전공자들의 취업이 좀 어렵고 중국어는 물론 일제가 작성한 우리 독립운동에 관한 동향보고 문서를 봐야 하니 일본어를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게다가 미주나 중앙아시아 등 디아스포라 연구도 같이 해야 하니 복잡합니다. 그러니 연구들을 안 하려 하고 현대사로 넘어가버려요. 이런 현상을 저는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처음 이곳에 와서 독립운동사연구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재임 중에 어떤 청사진을 그려주고 싶다”는 다짐을 표명했다.
기자는 또 유완식 자료부장의 안내로 독립기념관 자료 수장고를 둘러봤다. 무엇보다 수장고의 내부 화장실이 아직도 재래식이라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자가 다녀온 지 얼마 후 김 관장의 독려로 화장실 보수공사를 마쳤다고 알려왔다. 30여년의 민원이 김 관장의 취임 후 3주 만에 해결된 것이다.
수장고에서 오래된 태극기들을 보았다. 김구 서명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유완식 부장은 “김구 선생님이 임정(臨政) 주석으로 계실 때 서양 신부를 통해 미국 동포에게 전달하려 한 통일 염원의 글귀가 새겨진 태극기”라고 귀띔했다. 광복군 서명 태극기도 보였고 침략사 자료로 일장기도 보관 중이었다.
“수장고에 보관 중인 태극기가 100여 점 되고 이 중 문화재로 고증이 된 태극기는 10여 점 정도입니다.
이곳엔 독립운동가들의 옷도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옷은 이회영 선생의 의복입니다. 임정 시절 입으시던 옷이라 중국식 복장이지요. 저기 1948년에 개최된 런던올림픽 때 입던 단복도 좀 보세요.”
기자의 눈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독립운동사 자료 모두가 의연하고 우렁찬 외침이 스며들어 있다가 결연한 우리 역사의 숨결로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독립기념관에 전시하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철거된 《조선일보》 윤전기도 수장고 한쪽의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조선일보》는 2003년 3월 18일 1면 <일제말 강제폐간 당시의 조선일보 윤전기-독립기념관, 돌연 철거 결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 윤전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될 때까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의 연재 소설 등 한민족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일깨워주던 신문을 인쇄하다가 마지막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매각됐던 역사적인 연고를 가진 윤전기이다.>
이 윤전기가 언제쯤 시민과 역사의 품속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김 관장의 말이다.
“원래 개관 초부터 17년간 제6 항일사회문화전시관에서 전시해 오던 것을 2003년에 철거하여 수장고로 옮겼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철거하려면 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내외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신중하게 결정할 것입니다.”
강제철거 당했던 《조선일보》 윤전기
기자는 이종찬 광복회장과 일부 광복회 회원들이 김 관장을 향해 친일파, 뉴라이트 극우 공세를 펴는 이면에 이들이 가진 선민(選民)의식 내지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1945년 12월 12일 서울 국일관에서 한민당 측이 임시정부 요인에게 베푼 귀국환영연을 떠올려보았다. 당시 지청천, 조소앙( 趙素昻·1887~1958년) 등의 임정 요인들이 “친일 하지 않고 국내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왔겠느냐”며 친일 인사 숙청론을 편 적이 있다. 임정 요인들은 “국내에서 살면서 친일 안 한 사람이 있었겠느냐”는 입장이었고 그 후손들도 그런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 있던 한국인이 모두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잠재돼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임정이 집권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군정하에서도 임정 중심의 별도 국무회의가 열렸지요.”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귀국환영연에 참석했던 송진우 선생이 이렇게 나무랐다고 한다.
“우리가 일반 국민에게 임정을 모두 떠받들도록 한 것이 3·1 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이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두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도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이종찬 회장의 조부인 이회영은 김구, 이동녕(李東寧·1869~1940년)과 함께 임정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었다. 이 회장은 독립운동 집안 출신이 아닌 학자이자 NGO 출신의 김 관장을 한껏 흔들며 우월의식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김 관장은 꿋꿋이 버티며 제 역할을 다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김 관장은 독립기념관장 취임 석 달 전인 지난 5월 《고하 송진우와 민족운동》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책은 민족운동가인 송진우의 행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평가한 책이다.
그러자 이종찬 회장은 8월 1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김형석 관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시키면서 한편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고하 송진우를 죽인,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작업이(을) 진행되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이종찬-김형석 뒤에 임정 요인(김구)-송진우가 어른거린다.
사퇴 요구 현수막 철거한 김상옥 의사 손녀
기자가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며칠이 지난 뒤 김 관장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천안 독립기념관 입구에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명의로 된, 저의 사퇴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김상옥(金相玉·1890~1923년) 의사의 손녀이자 독립유공자 한훈(韓焄·1889∼ 1950년) 의사의 외손녀인 김영실 교수(총신대 평생교육원)가 직접 이곳 천안까지 내려와 철거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