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격려한 독일 뒤스부르크의 한 공회당. photo 이동훈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964년 12월 10일, 대한민국 국가원수 최초로 서독(현 독일)을 찾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고국에서 대통령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이날만큼은 양복과 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파독광부과 간호사 250여명은 뒤스부르크 교외의 한 공회당(타운홀)을 가득 메웠다. 박 대통령이 태극기가 내걸린 단상에 오르고 애국가 반주가 울려퍼지자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란 마지막 대목에서 몇몇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 옆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한복을 입은 아시아 최빈국의 영부인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당시 서독 신문에까지 게재될 정도였다. 박정희의 당시 서독 방문은 역대 대통령의 수많은 국빈방문 중 가장 모범사례로도 얘기된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뒤스부르크의 공회당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을 환영하는 파독광부들. photo 국가기록원

1964년 뒤스부르크 찾아간 박정희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자”는 박정희의 다짐처럼 당시만 해도 아시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6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어엿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1964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3만3745달러를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피식민국가 중 6·25전쟁이란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고도 이 정도 눈부신 발전을 거둔 나라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유일하다.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벤가릴 메논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단장)란 말은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다.

하지만 60년 전 대한민국 국가원수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서독 뒤스부르크의 한 공회당에서 했던 이른바 ‘눈물의 연설’과 관련해서는 지금은 기억할 만한 공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0월 12일(현지시간) 찾아간 독일 뒤스부르크 교외의 한 공회당. 라인강과 루르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한 유럽 최대 일관제철소 티센크루프제철소 아래 허름한 주택가에 자리한 이 공회당은 60년 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을 격려한 역사적 현장이다. 한 해 전 파독광부 1진이 파견된 함보른탄광회사가 운영한 뒤스부르크 함보른의 프리드리히 티센탄광과도 차로 불과 15분 거리다.

빛바랜 하늘색 페인트로 덮인 공회당의 모습은 기자가 독일 방문에 앞서 국가기록원을 통해 입수한 빛바랜 흑백사진 속 공회당의 모습과 일치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 공회당에서 연설을 하고, 파독광부 1진 대표 유재천씨의 안내를 받아 공회당 인근에 있던 파독광부 숙소를 직접 둘러봤다. 하지만 공회당에서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을 알려주는 그 흔한 기념비나 안내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직 파독광부들을 수소문해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공회당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공회당 뒤편의 테니스코트에는 지난해 걸어둔 현수막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공회당 앞에서 만난 한 집배원은 “평소에도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네주민은 “마을회관으로 쓰는데 문닫은 지 오래”라며 한국에서 왜 찾아왔는지 되레 궁금해했다. “60년 전 한국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자의 말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기자와 함께 공회당을 찾아간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의 양승욱 사무총장은 “재독 한인사회 내에서도 1964년 박 대통령이 연설했던 곳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며 “당시 영상을 보니 이곳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뤽아우프회’는 파독광부들의 모임으로, ‘글뤽아우프’는 ‘행운(글뤽)을 갖고 위(아우프)로 올라오라’란 독일 광부들의 인사다.

1967년 ‘동백림사건’의 트라우마

글뤽아우프회의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경 일부 파독광부들 주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뒤스부르크 공회당을 매입해 파독광부기념관으로 조성하자는 논의가 무성했다. 이곳은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서독 방문 35주년을 맞이해 1999년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부총재 신분으로 독일을 찾았을 때 동포간담회를 연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뒤스부르크 인근 에센에 이미 파독광부기념회관을 조성한 마당에 별도 기념관을 조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 목소리가 나오면서 결국 불발됐다. 공회당에 안내판이라도 세워서 당시 연설을 기념하자는 얘기도 나왔으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교민사회 내부에서마저 공회당과 관련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추진동력이 떨어지자, 공회당을 관리하는 뒤스부르크시 당국 역시 적극적으로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글뤽아우프회의 한 관계자는 “인근 주민들도 체육관으로 쓰는 공회당을 매입하면 체육관이 사라진다고 반대한 것으로 안다”며 “뒤스부르크시 역시 현지 주민들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연설한 공회당 매입과 안내판 부착이 불발된 가장 큰 이유는 일부 교민들이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보이면서다. 이는 과거 동·서독 냉전(冷戰)의 최전선이자 북한의 핵심 대남 공작거점에서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 등이 터지면서 생긴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육영수 여사(오른쪽). photo 국가기록원

‘反朴’으로 돌아선 재독 한인사회

북한은 과거 동독을 거점으로 서독에 나와 있는 유학생, 파독광부와 간호사 등을 포섭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 와중에 일부 한인들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무단접촉하는 이른바 ‘동백림사건’이 터졌다. 당시 김형욱 부장이 이끌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서독 한인회장을 지낸 작곡가 윤이상을 한국으로 납치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했다. 이에 서독 정부까지 개입했고 결국 서독 정부의 차관 취소 협박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윤이상을 대통령 특사로 석방하기에 이른다.

결국 박 대통령의 1964년 서독 연설 이후 3년 만에 터진 ‘동백림사건’으로 서독 한인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서독에 거주했던 한인들 가운데는 박정희 정권의 민정이양 번복(1963년),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등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했다. 파독광부들 역시 대학교를 나온 고학력자가 많았다. 당시 서독을 비롯 유럽을 휩쓸었던 ‘68혁명’의 분위기 역시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한 이후에는 서독 수도 본에서 ‘재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가 결성되는 등 ‘반박(反朴)’ 바람이 강타했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연설 이후 지난 60년간 적어도 재독 한인사회에서 ‘박정희’란 말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에센의 파독광부기념회관 한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연설 사진과 그 옆에 자리한 ‘유신독재 타도하고 민주사회 건설하자’ ‘박(정희)독재 타도하고 민족통일 이룩하자’는 민건회 소속 재독한인들의 시위 사진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재독 한인사회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정권 때 영남은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며 일자리가 넘쳐났던 반면, 호남은 먹고살 것이 없어 파독광부들 가운데도 호남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며 “지역적 요인들이 뒤섞이면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화됐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출신지역별로 크게 엇갈리는 것처럼, 재독 한인사회 역시 출신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린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한탄이다.

교과서에도 없는 박정희 서독 방문

박정희 대통령의 1964년 12월 서독 방문과 관련한 사실은 학교 교과서에서도 종종 생략된다. 최근 ‘우파교과서’로 논란이 된 한국학력평가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산업화’와 관련한 단원에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하여 외화를 벌어들였다” 정도의 간략한 서술에 그친다.

박 대통령이 당시 서독 수도 본에서 쾰른을 거쳐 뒤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아우토반을 직접 달리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구상이 나왔고, 뒤스부르크의 데마크(Demag)제철을 방문한 직후 포항제철 건설 구상이 나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다. 뮌헨의 교민간담회에서 데마크제철 출신 김재관 박사(전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을 받아든 사실을 언급하는 곳도 없다. 데마크제철은 당시 서독 철강산업을 주도하던 핵심 기업이다.

하지만 지난해 작고한 백영훈 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전 국회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한강의 기적’은 1964년 박정희의 서독 방문에서 시작됐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백영훈 전 원장은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때 통역으로 수행하며 뤼브케 당시 서독 대통령,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회담에 배석했다. 서독까지 타고 갈 비행기가 없어서 뤼브케 대통령과 직접 만나 “비행기 좀 빌려달라”고 읍소한 사람도 백영훈 전 원장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였다. 당시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지원을 끊었다. 당초 박 대통령은 미국 노스웨스트항공(현 델타항공) 비행기를 임차해 서독으로 가려 했지만, 노스웨스트항공은 출발 10일 전 비행기 임대불가를 통보했다. 일본과는 당시 미수교 상태였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종잣돈을 구하기 위해 손을 벌릴 곳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로,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서독밖에 없었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의 씨앗

결국 1964년 12월 6일 서독 정부가 제공한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이륙한 박 대통령은 홍콩(당시 영국령), 방콕(태국), 뉴델리(인도),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프랑크푸르트(독일)를 거쳐 28시간 만에 쾰른·본공항에 당도했다. 본 라인강변의 쾨니히스호프호텔(현 아메론호텔)에 여장을 푼 박 대통령은 12월 9일에는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도 가졌다. 2차대전 패전 후 15년간 서독 경제장관을 지내고,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후임이 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설계한 주역이다.

이 자리에서 에르하르트 총리는 경제장관 시절 두 차례 방한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려우니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위를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야 하고, 자동차를 만들려면 제철소가 필요하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모델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박정희에게 권한 것도 에르하르트 총리로 알려진다.

결국 1964년 12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결과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1억5900만마르크(약 4000만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대로 한·일 국교정상화도 서독 방문 이듬해인 1965년 전격 단행됐다. 이를 통해 얻어낸 대일 청구권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해 1970년 완공했고, 포항제철은 1968년 착공해 1973년 완공한 뒤 쇳물을 쏟아냈다.

한국 전자산업 역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베를린의 지멘스, AEG 공장 방문에서 단초가 마련됐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14년 3월 독일 베를린을 찾아 50년 전 아버지가 찾았던 지멘스의 가스터빈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의 싹이 1964년 12월 박정희의 서독 방문에서 움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한편 이 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경상북도는 올해 박정희 서독 연설 60주년을 맞아 뒤스부르크 공회당에 이를 기념하는 안내판이라도 붙이기 위해 뒤스부르크시 당국과 물밑접촉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북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결과 뒤스부르크시 측과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경북도 측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곳임을 알리는 동판을 제작해 뒤스부르크시 측에 기증하고, 뒤스부르크시가 이를 공회당에 세우는 식이다.

경북도, 기념판 설립 위해 물밑접촉 중

경북도의 이 같은 움직임이 알려지면서 글뤽아우프회 관계자들 역시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10년 전과 달리 국내 지자체에서 직접 뒤스부르크시와 교섭에 나선 터라,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엇갈리는 재독 한인사회 내부의 논란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뤽아우프회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동판만 세우자는데 큰 반대가 있겠느냐”라고 했다.

다만 뒤스부르크시 측은 10년 전에도 막판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전례가 있어 끝까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뤽아우프회 양승욱 사무총장은 “당시 뒤스부르크시 측과 거의 얘기가 됐는데, 뒤스부르크시의 한 동성애자 행사에서 일어난 사망사고로 시장이 교체되면서 흐지부지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독일 오버하우젠의 야코비탄광에서 일했던 백진건 전 에센 한인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뒤스부르크의 공회당 건물을 매입하려고 타진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며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내거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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