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오후 2시12분.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2분 뒤에 ‘드르륵’ 하고 교실 앞문이 열렸다. 희끗희끗한 파마머리의 유윤경(75)씨가 “아유, 되다. 아유, 되다”라며 자리에 앉자 주변 학생들이 “맨날 지각이여, 안 오는 줄 알았네”라고 한 소리를 했다. 평균 연령 73세의 고3 학생들이 모인 이곳은 서울 마포구의 일성여자중고등학교(일성여고) 3학년 5반이다.
고3 평균 연령이 73세인 학교
일성여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만학도들이 중·고교 과정을 공부하는 2년제 학력인정 평생 학교다. 오전반은 8시30분부터 1시까지, 오후반은 2시10분부터 6시까지 5교시로 진행된다. 3학년 5반 학생 40명 중 10명이 지난 11월 14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기자가 일성여고를 찾은 날은 19일부터 3일간 시행되는 학기말고사 바로 전날이었다. 담임 강래경(42)씨가 학기말고사 자리배치표를 칠판에 붙이자 그 앞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교시 수업에 들어온 과학 선생님은 학생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출석 체크를 했다. “구영희씨, 권순광씨, 김갑녀씨, 김길순씨, 김순이씨….”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학생들은 손을 들고 “네”라고 답했다. 학기말고사 전날이라 그런지 교과서와 공책을 펼쳐놓은 ‘할머니’ 학생들의 몸은 선생님을 향해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선생님이 “어떤 물질이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세포막의 인지질 이중층을 직접 통과하는 현상은?”이라고 묻자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확산”이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그래핀 같은 어려운 과학 용어들도 자신 있게 말했다.
“어릴 적 한 풀러 대학 간다”
쉬는 시간이 되자 칠판에 이름이 적힌 청소당번들이 빗자루와 물걸레를 들고 왔다. 반장인 오복순(72)씨는 학생들의 수학 숙제를 걷었다. 2년 내내 반장을 맡고 있는 오씨는 수시 전형으로 백석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에 모두 합격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싶어 수능을 봤다고 했다. 그는 “여자라서 초등학교만 졸업했는데 어렸을 때 공부를 하지 못했던 한 풀러 대학교를 가는 것”이라며 “나이 먹어서 금방 배운 것도 바로 잊어버리지만 공부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수학을 가장 좋아했다는 김안자(72)씨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 초4때 학업을 중단했다. “나눗셈 하는 걸 너무 좋아했는데 딱 그때부터 학교를 못 가게 했어요. 그때 초등학교만이라도 나왔으면 수학을 엄청 잘했을 텐데, 지금은 너무 어렵더라고요.” 서울 구로구에 사는 김씨는 왕복 2시간이 넘는 등하굣길을 매일 오간다. 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지만 김씨는 “학교 오는 길이 지친지도 모르고 재밌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학교를 오면 머리도 맑아지고 집에 있을 때랑 정신적으로 완전히 달라요. 졸업반이라 너무 아쉽죠. 여기서 너무 많이 배우는데 금방 잊어버려. 안 잊어버리고 싶은데….” 김씨는 매일 밤 9시부터 3시간 동안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한 뒤 잔다고 했다.
최명임(72)씨는 짝꿍인 김씨와 함께 수능을 봤다. 최씨는 “애들이 수능 볼 때는 엄마로서 잠도 못 자고 조마조마했었는데 이번에는 나를 위한다는 즐거운 마음이었다”며 “딸이 찹쌀떡을 사주며 응원해줬다”고 말했다. 최씨의 목표는 이번 학기말고사에서 90점을 맞는 것. 그는 “중학교 때는 모르는 게 많아서 헤맸는데 고등학교 때는 아는 게 생기니 공부가 너무 재밌더라”며 “후배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씨의 남편도 일성여고처럼 학력이 인정되는 평생학교인 진형중고등학교에 다닌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부부는 대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함께 국내 곳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5교시 국어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맨 뒷줄에 앉은 학생이 집에서 직접 만든 식혜와 곱게 깎은 단감을 꺼냈다.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은 간식을 나눠 먹으며 당 충전을 했다. 3시간 넘게 앉아 있느라 지칠 만도 했지만, 학생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수업은 마지막 시간이었다. 국어 선생님의 호명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정(75)씨는 “정보가 믿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이라는 질문에 바로 “신뢰성”이라고 답했다. 반사적으로 “땡”이라고 외쳤던 국어 선생님은 “죄송해요, 딩동댕”이라며 “너무 대답을 빨리 해서 당황했어”라고 했다.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씨는 취직시켜준다는 사촌언니를 따라 나섰다가 초5 때 학업을 중단하고 소아마비 갓난아기를 돌보는 일을 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학교 가려니까 창피해서 못 가겠더라”며 “그래서 공부 그만둔 것”이라고 했다. 16살부터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했고, 결혼 후에는 동대문시장에서 원단 장사를 하고 나염 공장도 운영하다가 시간이 훌쩍 갔다. 5년 전 공부를 다시 시작한 이씨는 사무실 청소 일과 병행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2년 전 일을 그만뒀다.
“학교 다니니까 쉴 새가 없어. 학기말고사가 있어서 잠잘 시간만 빼고 종일 공부했어요. 시험 끝나고 오라니까 청주 사는 친구가 표 끊어놨다고 내일 온다네. 그래도 공부 어느 정도 한 상태라서 잘 됐지. 3일 동안 시험보고 졸업사진 찍고 12월 7일에는 김장해야 하고, 8일에는 결혼식 있지. 계속 바쁘네요. 대학교 공부는 어렵다고 하는데 닥쳐봐야 알지. 사는 게 쉬운 게 하나도 없어.”
“80세에 한글 배우러 초1 입학”
3학년 5반 최고령 만학도인 김갑순(86)씨는 학교에 오는 데 1시간20분이 걸린다. 보문역에서 출발해 대흥역에서 내린다고 했다. 김씨는 “허리가 많이 아파서 언덕을 걸어 오르기가 힘들다”며 “대흥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학교 앞에 바로 내린다”고 말했다. 아파서 학교를 1년 동안 못 나오기도 했지만 학교는 자퇴서를 받지 않고 ‘건강해져서 돌아오라’고 했다. 그 덕분에 김씨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80세 때 성인 대상 학력 인정학교인 양원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김씨는 “한글을 몰라 남한테 매일 손 벌리는 게 싫어서 초등학교에 갔다”며 “거기서 기역, 니은부터 배웠다”고 했다. “나한텐 점수가 중요하지 않아요. 배우는 게 그냥 재밌는 거지. 시험 보면 떨린다는데 떨리기는 뭐 떨려. 아는 건 풀고 모르는 건 찍고 그래야지.”
일성여고의 졸업식은 내년 2월 25일이다. 이번에는 중3 258명과 고3 243명 총 501명이 졸업할 예정이다. 18년 연속 졸업생 100% 대학 합격 기록을 세운 일성여고는 올해 19년째 만학도들과 함께 도전에 나서고 있다. 3학년 5반 담임 강씨에 따르면 재적 인원 40명 중 수시로 대학합격증을 받은 만학도는 현재까지 36명이다. 할머니 학생들이 떠났지만 불 꺼진 3학년 5반 교실에는 열정과 온기가 가득했다. 책가방을 멘 할머니 학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깜깜해진 하굣길을 걸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