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기자

◇‘그로기 상태’ 빠진 복지부

세종시에 근무하는 A 사무관은 오전 7시 30분이면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사무실로 출근한다. 민원 업무를 처리하다가 오전 9시가 되면 복지부 건물 7층에 있는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사무실로 올라가 일한다. 복지부는 의정 갈등 주무 부처여서, 직원들이 지난 2월부터 9개월째 교대로 중수본 업무를 보름씩 겸임하고 있다.

오후 6시쯤 중수본에서 퇴근한 A 사무관은 복지부 사무실로 돌아온다. 그는 지자체 예산 배정 작업과 국회 답변 자료 등을 작성하다가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퇴근한다. 토요일은 쉬고 일요일에 출근해 밀린 일을 한다. A 사무관처럼 중수본 업무를 겸직하고 있는 복지부 공무원은 현재 170~180명 정도다.

관가에선 최근 3년간 대유행한 코로나에 이어 올 초 시작된 의정 갈등 문제까지 맡은 보건복지부가 쏟아지는 일거리에 ‘그로기(강펀치를 맞고 비틀대는)’ 상태에 빠졌다는 말이 돈다. 이로 인해 복지부 정원(867명)의 13%인 115명이 현재 휴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휴직자의 87%(100명)는 사무관(5급)과 주무관(6·7급)이라고 한다. 실무를 담당하는 ‘손발’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복지부에는 중수본 외에도 다른 ‘겸임직’이 즐비하다. 현재 복지부 내에는 ‘마음돌봄 TF(태스크포스)’, ‘코로나19 후속관리팀’, ‘연금개혁 추진단’ 같은 TF가 1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직원들은 “의료 개혁 업무 외에도 코로나 후속 관리, 국민연금 개혁 작업 등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내부 TF를 겸임하고 있는 복지부 공무원은 120명 정도라고 한다. 중수본까지 합치면 복지부 정원의 34%(약 300명)가 ‘낮엔 TF 팀원, 밤엔 사무관’ 식의 겸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복지부에서 우울증을 호소하며 휴직하는 일선 직원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현재 복지부 휴직자 115명 중 서기관(4급) 15명을 제외한 100명은 모두 한창 일할 사무관과 주무관이다. 휴직 사유 상당수는 육아 휴직이지만, 자신의 질병이 드러나는 걸 꺼려 육아 휴직을 받아 업무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남아 있는 직원 대부분도 번아웃(극도의 피로) 상태”라며 “일할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새 업무 지시는 계속 쏟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 정부 4대 개혁 과제 중 절반인 의료·연금 개혁 외 다른 일거리도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 정부세종청사/보건복지부

실제 복지부에는 올해만 7개의 내부 TF가 새로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출생통보 및 보호출산제 시행 추진단’ ‘사회 서비스 정보 시스템 구축단’ ‘요양·돌봄 통합지원단’ ‘WHO(세계보건기구) 세계 바이오 서밋 개최 추진단’ 등이다. 복지부 사무관들 사이에선 “의정 갈등이 언제 끝날지 몰라 더 지친다” “한두 군데 병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파다하다.

한 경제 부처에서 파견을 온 사무관은 낮엔 중수본 일을 하고, 밤엔 복지부 업무를 하다가 지난 10월 구안와사(안면 신경 마비)가 와서 병가를 냈다. 지난달엔 한 복지부 서기관이 녹내장이 심해져 휴직을 냈다고 한다. 구안와사와 녹내장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피로와 스트레스다.

정부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처들이 실무 직원들을 복지부로 더 파견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일손은 없는데 지시만 떨어진다면 정책이 실현되지 않고 유야무야된다”고 했다.

◇관가 분위기는 ‘복지부동’

“예산 깎이니 일 안 해서 좋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경제 부처의 한 간부급 공무원 A씨는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보좌진과의 통화에서 이 같은 취지로 말해 구설에 올랐다. 당시는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내년도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정부의 역점 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한 직후였다.

이를 두고 국회에선 “담당 공무원이 정부 편성 예산을 감액한 야당에 도리어 보은(報恩)성 인사를 했다더라”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 쟁점 예산이 깎인 데 반발하던 국민의힘 측은 해당 부처 책임자에게 “직원들 말조심시키라”고 경고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얘기를 접한 정부 관계자는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요즘 관가(官街) 분위기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일화임은 분명하다”고 했다.

실제 공무원들과 직접 접하는 국민의힘 보좌진들 사이에선 “중앙부처의 예산 방어 의지가 예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윤석열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면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4월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크게 패한 이후 공무원들이 정부 역점 사업에서 발 빼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한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관계자는 “국정감사에서 쟁점 사안에 대해서 야당이 공세를 펴더라도, 부처에서 대응 논리도 만들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더라”면서 “이제 공무원들이 몸 사리는 차원을 넘어 친(親)야당 성향까지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경우, 담당 공무원들이 오히려 민주당과 밀착해서 입안·입법하는 경우도 보인다는 것이 여권 관계자들 얘기다.

민주당은 입법권, 탄핵 소추권, 예산 심의권으로 관가의 이런 균열을 파고들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당정이 당원 게시판 같은 민생과 무관한 논란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공무원들이 일손까지 놓고 있는 설상가상의 상황”이라면서 “이런 식이면 내년엔 식물 정부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일지 모른다”고 했다.

◇방치된 여가부

지난 10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장에선 여가부 장관 자리가 장기간 비어 있는 데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민주당 간사 김한규 의원은 “동네 통장도 이렇게 오래 비워두진 않는다”면서 여가위 차원에서 ‘장관 조속 임명 요구 결의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가부 장관 자리는 지난 2월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 수리 이후 10개월째 공석이다. 신영숙 차관이 직무 대행을 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취임 후 추진하려 했지만 야당 반발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후임 장관을 임명하지도 않아 아예 부처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장 공백’이 길어지면서 여가부가 역할을 해야 할 때 나서지 못했다. 올 들어 경기 하남 여자친구 살해 사건, 서울 강남역 의대생 살인 사건, 유튜버 쯔양의 불법 촬영·영상 유포 협박 사건 등 여성 대상 교제 폭력·살인 사건이 빈발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재발 방지 대책을 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여가부는 눈에 띄는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특히 지난 8월 ‘딥페이크’(얼굴 등을 합성한 가짜 콘텐츠) 성범죄 사건이 터졌을 때 여가부 존재가 희미했다는 의견이 많다. 성폭력 예방 정책 주무 부처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컸는데도, 여가부 역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신영숙 차관은 국무회의에서 딥페이크 관련 발언을 하지 않았다. 지난 5월 열린 디지털 성폭력 범죄 대책 마련을 위한 당정 협의도 여가부 없이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법무부, 경찰청만 참여했다.

여가부는 현재 장관뿐 아니라 각종 성범죄에서 여성과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권익증진국장, 정책기획관 등 핵심 보직도 비어 있다. 여가부는 지난 9개월간 대통령실이나 국회에 장관 임명을 건의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가부 예산은 올해 1조7234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내년엔 올해보다 5.4% 증가한 1조8163억원이 편성됐다.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 대응 예산이 대폭 확대됐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장관 직무대행이 지난달 18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2025년도 예산안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뉴시스